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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인트 Mar 10. 2020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20세기 말, 내가 다닌 컴퓨터 학원에선 처음 온 학생들에게 한글과컴퓨터에서 개발한 <한컴타자연습>으로 정석적인 타자법을 가르쳤다. 마치 태권도 학원에 막 등록한 흰 띠처럼, 나도 처음 한 달여 간은 타자 연습을 아주 충실하게 했다. 키보드를 탁하고 두드리면 그대로 모니터에 문자가 나타나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다. <한컴타자연습> 외에도 학원에서 종종 쓰인 타자 연습 프로그램으로 <한메타자>와 <신의 손> 등이 있었는데, 각각 개성 있는 타자 연습용 게임들이 존재했다. 기본 타이핑을 다 떼고 난 뒤에도 종종 이 프로그램들은 유용했다. 손을 풀기에도 좋은 도구였고, 때론 심심함을 달래주는 기분전환용 게임이기도 했고, 친구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기에도 유익했다.


   타이핑 속도와 정확도를 측정하는 기능을 타자검정이라고 하는데, 타자 연습 프로그램의 꽃은 바로 ‘장문 타자검정’이다. 1~10분 정도의 세팅된 제한 시간 동안 주어진 지문을 따라 타이핑을 하는데, 1분당 타수(타/분) 단위로 기록이 나오며 오타가 발생한 채로 종료되면 페널티가 주어진다. 학원생들 사이에서는 5분짜리 장문 타자검정이 곧 타자 실력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로 여겨졌다. 1~2분 정도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손이 꼬이는 등의 조그만 변수로도 큰 차이가 나므로 다소 운이 필요하다. 그러나 5분의 타자검정은 정확하고 빠른 타이핑은 물론이고, 초반에 너무 신을 내다 손이 빨리 지치지 않고 막판에는 스퍼트가 가능하도록 체력을 안배해야 하며, 잠시 페이스가 흔들리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금방 본 궤도를 되찾을 수 있는 멘탈과 집중력까지 종합적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치 쇼트트랙에서 500m와 1,500m 경기의 차이와 비슷하다.

   당시 <한컴타자연습>에는 10개 정도의 한글 지문이 존재했는데, <들사람 얼>, <동백꽃>, <별 헤는 밤>, <메밀꽃 필 무렵> 등 유명한 문학 작품들이 수록되었고, 레이아웃을 맞추기 위한 띄어쓰기가 난무하는 <보고서>라는 무시무시한 지문도 있었다. 나중에는 파일 추가를 통해 지문을 추가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지만, 학원에서 인터넷이 없이는 제대로 된 검정용 지문을 퍼올 수가 없었다. 정해진 지문 세트만을 가지고 연습을 하면 금방 익숙해지기 마련이라 우리는 컨디션이 좋으면 400타를 넘나들었다. 처음에는 타이핑에만 주력하게 되고 글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문에 익숙해질수록 여유가 생겨 내용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타자검정을 하던 우리는 어느 날 ‘Page Down’이라는 키의 기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Page Down을 누르면 오타 페널티 없이 지문 상의 페이지를 넘겨버릴 수 있었는데, 시작하자마자 맨 뒤 페이지까지 넘긴 뒤 몇 안 되는 남은 문장들만 입력하면 타자검정이 바로 종료되기 때문에 바로 그 마지막 페이지만 숙달하면 높은 타수를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개의 지문 중 맨 뒤 페이지에 글자가 가장 적은 지문은 바로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었다. <별 헤는 밤>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단 한 문장만 있었다.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나는 높은 타수를 기록하고 싶어서 이 마지막 문장을 반복해서 연습했고, 이 부분만 해서 1,000타에 육박한 기록을 내기도 했다. 이 문장 앞에서 격정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기에,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그려진 이 문장의 톤은 마치 나라를 구할 듯한 기개로 웅변하는 당당한 선포였다. 그리고 시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명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최초에 작성된 버전에는 없었다고 한다. 원래는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로 끝을 내었다가, 친구의 평을 듣고 차후에 마지막 연을 추가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때 윤동주의 톤은 내 어릴 적 상상과는 달리 그저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한 소박한 바람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영화 <동주>를 통해 해석된 윤동주는 한없이 부끄러워하는 사람이고, 그의 시 중에서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흔적들에 주목한다. 시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살아 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강변하면서도, 때때로 자신이 시대에 맞서 몸으로 저항하지 않고 함축된 글쓰기 속에 숨어버린 사람이 아닐까 하는 내적 갈등을 반복한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극 중 정지용 시인의 말처럼, 윤동주는 자기 내면의 부끄러움을 내팽개치거나 숨기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 애쓴 사람으로 보인다. 그의 시가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동시대의 진실을 드러낸 민족주의적 시로 읽히는 까닭은, 시인이 세상을 눈여겨보면서도 동시에 자신과의 대화와 성찰을 착실히 쌓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올해는 글을 많이 쓰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동기와 목적이 명확지 않았다. 다만 내가 풀어낼 만한 글감을 찾아 두어 달 글 조각을 쌓다 보니 드러난 속마음이 한 가지 있다. 나는 그저 글을 쓴다는 핑계로 나와 조금 더 친밀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었다. 나름 성찰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간 삶의 선봉에 서서 시급한 난관들을 헤치며 전공을 쌓아 올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방치되고 파편화된 부분들이 있다. 딱지처럼 피부에 굳어진 상처와 화, 푸석푸석해져서 마주하기 싫어지는 내면, 현재와의 연결고리가 약해져 무의미해져 가는 과거 등 챙겨야 할 요소들이 많다.

   이런 파편화는 내 안에 서로 다른 나들을 만들어낸다. 물론 매 순간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이며, 더 나아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인간의 좁은 시야로는 일관성이 있니 없니 판단이 가능한 재판관도 없겠지만,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가치들이 오래 공존할 때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요소들이 진실로 모순을 일으키는지, 외부로부터 주입된 통념이나 억압으로 인해 모순된다고 느껴질 뿐인지, 나다움을 심히 훼손하고 있는 일인지, 좀 더 지켜보고 판단해도 될 일인지, 타협점을 도출할 여지가 있는지 등을 물어야 한다.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분야가 전열을 가다듬어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뤄내기 위해 이처럼 외면치 않고 정직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


   나는 직업으로 글을 쓰는 것도 아니요, 믿을만한 재능도 없으며, 특단의 노력을 기울일 형편도 아니다. 글을 써서 세상에 거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도 아니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 위함도 아니다. 아마도 나를 위한 글을 쓰게 되겠지. 그러나 나 또한 특정한 시대에 몸을 담고 있으니, 시대의 산물이 됨을 피할 도리가 있겠는가. 그러니 금물임을 알면서도, 그저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듯 가장 개인적인 글을 써나가다 보면 결국 시대 속의 나 역시 자연스레 묻어나게 되리라 속단한다. 그날에 부디 부끄럽지 않은 진실을 담기를 소망할 뿐이다. 언젠가는 나의 공간에 자랑처럼 좋은 글이 무성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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