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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Jul 21. 2020

<다름>을 알면 보이는 세상

함께 하는 이에게 작은 위로를.

*어떤 죽음*


며칠 전 서울시장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오늘은 장례식이 있는 날.


그 죽음에는 두 가지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애도하거나 비난하거나.


애도와 비난.

누가 맞나요. 무엇이 옳은가요.

무엇을 선택하든 우리는 서로 불편합니다. 


그 둘이 평화롭게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에피소드 1*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바람도 세차게 불었지요.

미화실 직원들과 티타임을 마칠 즈음이었습니다. 

A: (푸념하듯이)"요즘 뉴스가 아주 난리더구만. 그렇다고 자살을 하냐"
B: "그러게. 1년에 수십억씩 벌었다고 하는데 돈 좀 집어 줬으면 안 그랬을 거 아냐?" 
C: (흥분하며)"언니, 나는 정치 이야기 질색이야, 그런 이야기 하지 좀 마"(C는 자리를 박차고 떠난다)
D: (정색하며)"아니, 여사님. 누가 수십억씩 돈을 벌었다고 해요?"
B: (눈을 과도하게 크게 뜨면서)"과장님은 방송도 안 보세요. 다들 그래요"
D: (답답해하며)"아이고, 가짜 뉴스예요. 그분의 삶을 보세요. 그리고 지금 조사 중이잖아요?"
A: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B: (약간 언성을 높이며)"아니, 뻔한 거 아니에요? 조사해 보나 마나예요"
D: (인상을 찌푸리며)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좀 더 지켜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아요?"
B와 D도 자리를 뜬다.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원본 그대로 옮겨보았습니다. 적고 보니 연극의 한 장면처럼 적나라했습니다.

누군가 뉴스 이야기를 꺼냈고,  회의에 참석했던 네 명은 한 마디씩 자기 생각을 말했습니다. 물론 저도 한마디 했고요. 공교롭게도 모두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요. 4인 4색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이 우리를 조금씩 불편하게 했습니다. 


*불편함을 벗어나는 묘약-명상*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명상을 하였습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내려놓아라'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하는 명상은 말 그대로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명상법입니다.

내 마음을 살펴보았다.
온갖 부정적인 마음들이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 무시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짜증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하나씩하나씩.

그런 마음들을 버리고 나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구나.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했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답답했고 그들이 미워졌던 것이었구나.


*<다름>에 대한 새로운 각성*


명상을 통해 마음을 버리기 시작하자 또 이런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지? "

간단했습니다. 제가 가진 생각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형성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견해를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죠. 그것도 완강히.  제가 경험한 것이었므로.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통해 만들어진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기 생각은 옳습니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말이지요.

따라서 우리에게 <다름>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공통의 경험들이 있어 연대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깊이 파고들면 결국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예외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다툼과 갈등으로 이어지는 걸까요?  

명상은 이어집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다름>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는 제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오늘 아침 명상을 하면서  <다름>을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다름을 아니까 그 사람들이 이해되었고요,
이해가 되니까 답답한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다툼과 갈등이 사라졌습니다. 
놀랍웠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화 낼지도 모릅니다. 

"나도 안다고, 나도 우리가 다르다는 것쯤은 안단 말이야!!!"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묻고 싶어요.

"당신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나요? 다른 사람과 다툼이나 갈등이 없나요?"

<다름>을 알면, 그 사람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해한다면 다툼이나 갈등은 줄어들 것입니다.


*에피소드 2*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교류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만나게 되고 <다름>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요. 물론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도 언젠가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 경험으로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만약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 <다름>을 알았다면, 그래서 내가 옳다는 신념만 버렸다면, 이런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A: "요즘 뉴스가 아주 난리더구만. 그렇다고 자살을 하냐"
B: "그러게. 1년에 수십억씩 벌었다고 하는데 돈 좀 집어 줬으면 안 그랬을 거 아냐?" 
C: "아, 언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사실 나는 정치는 관심이 없어. 먼저 갈게"(C는 자리를 떠난다)
D: (궁금해하며)"아니, 여사님. 그분이 수십억씩 돈을 벌었다고 해요?"
B: "과장님은 방송도 안 보세요. 다들 그래요"
D: "그렇군요. 저는 다른 방송을 보았는데 지금 조사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A: (먼저 자리를 떠난다)
B: "그런 방송도 있었군요. 뭐가 옳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D: "저도 잘 몰라요.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겠지요."
(B와 D도 자리를 뜬다)

 

에피소드를 새롭게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마무리하며*


우리에게는 오늘 어떤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있습니다. 애도와 비난.

또 일상에서는 수많은 <에피소드 1>을 경험합니다. 모두 <다름> 때문이겠지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에게 애도와 비난은 공존이 가능할까요? <다름>이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름>의 본질을 바로 안다면, 

관념의 앎이 아닌 깨침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내려놓는 명상으로 말입니다.


당신의 삶에 작은 위로가 있기를 소망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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