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마음 치유하기
예수님에게 누군가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 "
"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니라."
선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똥 막대기다."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
"...... "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이런 질문들은 인류가 지성을 갖추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진 의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장구한 세월이 지났건만 명쾌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히려 이런 질문들을 불편해한다.
"그딴거 몰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어" "쓸데없는 질문이야" "철학하는 사람이나 하는 거지"
하지만 거울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나는 거울을 통하여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다. 왜곡을 일으키는 거울은 끊임없이 고통을 일으킨다. 거울은 내가 되어 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거울이 내가 아님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겹쳐져서 살고 있는 거울과 본래 나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진짜 나를 만나는 것이다.
주범만 찾아서 없애면 고통이 없을 것이다. 영원히 고통없는 세상, 자유로운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수 있어야 한다. 남의 말이 아닌 스스로 깨침으로.
거울을 흔히 <가짜인 나>라고 하고 가짜인 나에 가려져 있는 나를 <참 나>라고 표현한다. <가짜인 나>를 심리학에서는 에고, 기독교에서는 겉사람, 불교에서는 허상, 거짓된 나 등 무수한 단어로 표현한다.
참나와 가짜인 나가 한 몸으로 살기 때문에 진짜인 나를 알 수가 없다. 분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진리에서 왔는데 태어나면서 가짜인 나와 하나가 되어 평생을 살고 있다. 왜곡된 현실 속에서 희로애락의 파도를 경험하고 울고 웃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가짜인 나>는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가짜인 나>부터 벗어나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속박과 고통의 애급 땅에서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에덴으로 가라고 한다. <출애굽>이다.
불교에서는 고통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라고 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다.
마음수련 명상에서는 인간 마음을 버리고 우주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모두 같은 말이다.
<참나>가 사는 세상은 극락, 천국, 유토피아, 에덴...
<거짓된 나>가 사는 세상은 사바세계, 땅, 고해, 애굽...
성경에 보면 하나님도 너희 안에 있고 천국도 너희 안에 있다고 했고
불경에는 네가 부처고 너의 마음이 부처라고 했다.
가짜인 나만 없애면 본래 있던 실상, 참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통의 근원이 사라져 진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간단한 내용이지만 모든 종교와 사상, 철학을 아우르는 '과격한' 이론이다. 내가 직접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찾아다닌 결과물이다. 수많은 방황과 좌절이 있었다. 다시 해보라면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짜인 나를 없앨 수 있을까?
2001년도 개봉한 <달마야 놀자>라는 코미디 영화가 있다.
영화는 조폭들이 세력다툼을 하다가 쫓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조폭 일당은 은신처로 산중 사찰에 가게 되고, 쫓아내려는 스님들과 갈등이 생긴다. 서로 양보할 수 없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주지스님은 배틀을 제안하고 이기는 팀의 뜻에 따르라고 한다. 대결이 시작되었다. 익살스럽고 재미있는 게임이 이어진다. <삼천배>와 <369 게임>은 스님들이, <고스톱>과 <수중 잠수>는 조폭들이 이긴다. 2 : 2 팽팽하다. 승부는 다시 원점이다.
마지막으로 주지스님이 기가 막힌 제안을 한다. 일명 <깨진 항아리에 물 채우기>. 제한 시간은 10분. 단, 깨진 독을 막아서는 안된다.
시작과 함께 조폭들은 신발과 표주박을 이용해서 물을 채운다. 하지만 물을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다. 뒤집어 놓고도 해보지만 어림없다.
스님들은 방법을 달리했다. 상좌 스님이 깨진 항아리 속에 들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마음이 물이요, 몸은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하지만 주지스님은 일갈한다. "내가 물을 채우라 했지 몸을 채우라고 하지 않았느니라."
그럼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운단 말인가.
그때였다. "가자!" 조폭들이 항아리를 들고 연못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연못 속으로 항아리를 던진다. 풍덩~ 깨진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오른다. "항아리에 맑은 물이 아주 철철 넘치는구나" 주지스님이 웃으며 말한다. 스님들이 졌다. 덕분에 조폭들은 사찰에 더 머물 수 있게 되었다.(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는 장면은 다시 봐도 소름 돋는다.)
조폭이 주지스님에게 묻는다.
"저희들을 이렇게 감싸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내가 낸 문제를 너희들이 풀어줬기 때문이지"
"저희들은 그.. 그냥 항아리를 물속에 던졌습니다."
대답 없이 주지스님은 돌아서 간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린다.
"나도 모르는 문제를 풀어놓고서 뭘 모른다고 하는지..."
스님도 모르는 인생의 문제를 한낱 강패들이 풀어냈다는 독백이다. 주지스님은 수행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정작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는데 그 장면을 보고 무릎은 친 것이다.
(이런 명대사와 장면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경이롭다. 감독은 알고 만들었을까?)
<가짜인 나>를 없애는 것은 마치 깨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다.
<가짜인 나>를 이긴 사람은 없다. 내가 나인데 어떻게 나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마치 깨진 독에 물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나를 이기는 방법은 나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는 것처럼. 가짜가 없어지면 진짜는 저절로 드러난다. 구름이 걷히면 밝은 태양이 드러나는 것처럼. 원래 태양은 그곳에 늘 함께 있었다. 구름에 가렸을 뿐이다.
가짜인 내가 없어진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다시 말하면 진리가 된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