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을 시작하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깨진 항아리에 물 채우는 장면'은 행복에 대한 세 가지 인식을 담고 있다.
첫째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행복이다. 조폭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조폭들이 처음 선택한 방법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많은 것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통장 잔고를 담고 부동산을 담는다. 사랑하는 연인, 좋은 직장, 명예와 권력 등으로 나를 가득가득 담으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담아도 담아도 채워지지 않는다. 채웠다고 하더라도 곧 없어져 버린다. 결코 담아질 수 없는 깨진 항아리처럼.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 왕이 고백이다.
둘째,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행복이다. 스님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고 선택한 방법이다.
역시 스님들은 달랐다. 현실의 문제를 마음으로 풀었다. "마음이 물이요, 몸은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그럴듯하다. 실제 물은 채우지 않고 관념으로 채운 척한다. 스님은 일갈한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물을 채워!" 밥은 먹어야 배가 부른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편안해도 주린 배는 채워지지 않는다. 스님들이 선택한 방법은 종교인이나 철학자 등이 추구하는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은 결코 관념이 아니다.
셋째, 진정한 행복이다. 영화는 '깨진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는 행위'로 말하고 있다.
불완전한 나 자신을 진리의 바다에 던지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 안에, 부처님이 내 안에, 진리가 내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짜인 내가 없는 사람은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묶여 있지 않는다. 따라서 걱정이나 근심,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산다. 보는 대로 있는 대로 왜곡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무엇에도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는 순리의 삶을 산다. 쓸데없는 생각이 없고 오직 하는 일에만 전념하니 성공할 것이다. 학생은 공부를 잘하고 사업가는 돈을 벌 것이다. 아픈 사람은 건강해질 것이다. 만병의 근원이 마음이므로. 당연한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성인의 말씀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현재 내가 살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다. 내 삶에 쓰임이 없는 거라면 의미가 없다.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지금 고통이 있는가, 근심 걱정이 있는가, 두려움과 불안이 있는가.
있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얼마 전 그분과 대화를 통하여 문제는 풀렸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나에게도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처음 명상을 할 때에는 메인센터에서 집중 수련을 하였다. 그렇게 명상을 할 때에는 정말 마음이 편안하고 긍정적이 되고 일에도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수련원을 떠나 일상생활을 할 때에는 도로 마찬가지였다.
최근 중국 무술의 고수와 격투기 선수의 실전이 유튜브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결과는 무술 고수의 참패였다. 품세는 좋은데 실전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자기 수양은 되겠지만 나 자신을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절이나 교회, 명상센터에 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좋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유지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신앙생활과 명상을 열심히 해도 일상에서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무슨 소용이람."
이런 생각을 가지다 보니 명상도 게을리하게 되었다. 사실 명상을 한다고 내 삶이 바뀔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한 지 7년이 되어간다. 7년이나 되었는데 나는 왜 우주 마음이 안될까? 왜 내 삶은 변화하지 않을까? 왜 여전히 어떤 상황이 되면 불안하고 화나고 슬프고 외로운가?
둘 중 하나이다. 마음수련 명상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방법대로 하지 않거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나는 1년에 얼마나 명상을 할까? " 날짜로 하면 한 달 정도?
헬스장 1년 티켓 끊고 한 달 다닌 사람이 트레이너에게 "왜 근육이 안 생기죠?" 따지는 사람은 없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시비하고 있었다."왜 마음이 편치 않죠?"라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수련 명상을 했다고 한다. 각자 자기 생각을 가지고 판단을 할 것이다. 게 중에는 부정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가보지 않은 길은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10년, 20년,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헬스장 끊고 다니지 않은 사람처럼.
얼마나 많이 명상센터에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헬스장만 열심히 다닌 사람처럼.
중요한 것은 '정확한 방법대로 명상을 했는가'이다.
헬스장에서 트레이너의 지도에 따라 정확히 한 사람은 목적을 이룰 것이다.
다시 명상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 헬스장을 가는 마음으로.
방법대로 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확신도 들었다.
그날부터 매일 명상을 시작했다. 실천하면 <나> 아니던가.
마음수련 명상은 가짜인 나를 버리는 명상법이다. 상대를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 올라오는 마음을 비워나갔다. 상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보고 올라오는 내 마음을 탓하고 버렸다.
비난하는 마음이 들면 "이런 추접한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버렸다.
열등감이 들면 "아직도 이런 열등감이 있었네"라고 버렸다.
그동안 몰랐는데 내 마음이 온통 쓰레기통이었다. 온갖 악취와 벌레가 들끓는. 그러니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뭐가 좋다고 그 쓰레기들을 부둥켜안고 살았던가. 쓰레기인 줄 몰라서였다. 그 쓰레기들이 나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버리면 죽는 줄 알았다. 거지를 줘도 가져가지 않을 냄새 풀풀 나는 쓰레기를.
내 마음과 내가 가짜이고 쓰레기라는 인식이 명확해지니까 버리는 게 쉬었다. 무엇보다도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 감사했다. 이 방법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렇게 살 것이다. 물론 명상을 하면서 의문과 회의는 끊임없이 있었다.
"이렇게 한다고 정말 될까?"라고 올라오는 마음도 버렸다.
"잘 버려지고 있나"라고 확인하는 마음도 버렸다.
참과 허의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었다.
언제부턴가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이 저절로 되었다. 걸을 때나 운전할 때도 명상을 할 수 있었다. 일에 뼈져 있을 때는 잊기도 하지만. 점점 명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람의 말에 대한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 걱정도 근심도 점점 없어졌다. 활력이 조금씩 살아났다.
불가에서는 '움직이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선을 행하라(행주좌와)' 고 했다. 기독교에서는 깨어 있으라 했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선이 무엇이고 기도는 무엇인가? 선을 어떻게 해야 하고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찾아본 바로는 구체적인 방법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죽어서 천국 가는 줄 알고 있고, 성불은 다음 생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곳에는 지금이 없었다. 지금은 어떡하라고?
그대로 하면 되었다. 승패는 명확하다. 허는 참을 이길 수 없으므로.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