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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Aug 25. 2020

밥보다 명상(6)

감사함만 남고

<나를 버리기가 힘든 이유>


자기를 버리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가르침이 아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였고, 불교에서는 남음이 없는 죽음인 무여열반, 대반열반을 가르치고 있다. 심청전에서 조차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져 연꽃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한다.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고, 살려고 하는 죽는다. 죽어야 산다. 가짜인 나를 버려야 진짜인 내가 산다.


그렇다면 이루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행복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와 예수님, 진시왕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인류 최고의 욕심쟁이였다. 이 세상에 없는 영원한 생명을 원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모든 집착을 버려 해탈을 이루었고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부활을 이루셨다. 

진시왕은? 거대한 병마용 무덤만 남겼다. 관광지로 유명하다고 한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고, 석존은 " 집착을 버리면 해탈한다"라고 하셨다. 성인이 하신 그 말씀만 되뇌고 있다. 실제 행함이 없다.
 만일 내가 교회에 다니는데 진리를 통해 자유롭지 못하다면, 내가 절에 다니고 있는데 집착을 벗어나 해탈하지 못했다면,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이것이야 말로 큰 문제가 아닐까. 

이 세상 모든 교리와 이론이 있는 이유는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다. 진리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 믿지 않는 것이다. 그냥 성인들을 추종할 뿐이다.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매년 초파일 사찰에 가면 무수히 많은 연등이 걸려 있고 소원이 적혀 있다. 무병장수, 건강, 가정화목, 승진...

교회에 가면 지성으로 기도를 한다. 가족이 건강하고 하는 사업이 잘되고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 벗어나도록...

영험담이나 기적은 절에도, 교회에도, 정화수 떠 놓았던 장독대에도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유한하며 부질없다는 것을 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다만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를 따름이다. 천국, 극락, 유토피아... 등등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글을 통해서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서 가야 할 곳이다. 지금 이루어야 할 삶이다.


이제 우리 진짜를 한번 만나야 하지 않을까?

진짜 내 삶을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짧은 소회>


살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경험, 아마 누구나 한 번쯤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열심히 살았다. 대학 졸업 후 좋은 직장에 취직했고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물질적으로 외형적으로 많은 것을 가졌다. 하지만 그 정점에서 어느 날 찾아온 허무함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좌절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직장 다닐 때였다. 어느 날 도올 선생의 <노자와 21세기> 강의를 듣고 지금까지 삶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정신적인 세계에 눈을 떴다. 나의 허무함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찾아 나섰다.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를 시작으로 동서양 철학을 접했다. 자기 계발, 심리학, 천문학, 신지학, 양자물리학 책을 보았다. 의식의 흐름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톨릭, 불교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출가였다.  

사실 도올 선생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누구나 노자의 <도덕경>을 구입하지는 않는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출가하는 일은 더더욱 드문 일이다. 나는 왜 반대를 무릅쓰고 그런 고생길을 제 발로 걸어간 것일까? 돌이켜 보면 내 '성질머리' 때문이다. 나는 한번 꽂히면 열심히 한다. 책을 보다가 꽂히면 저자의 책을 모조리 읽어 본다. 저자를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번번이 한계에 부딪혔다. 변화하지 않는 나. 어떡할 것인가.
어느 날이었다. 출가하여 수행하면 번뇌를 끊을 수 있다는 글을 보았다.  그리고 출가.

나는 절에 있을 때 스님들을 만나면 묻곤 했다. 

"스님은 번뇌를 끊으셨나요?" 대부분 아니라고 한다. 

"그럼 번뇌를 끊었다는 사람은 보셨나요?" 물론 못 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번뇌를 끊었다는 사람을 보았다는 사람이라도 보았나요?" 그러면 웃는다. 나도 웃는다.


불교 경전에는 분명히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번뇌를 끊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내 허무함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불교는 그렇지 않았지만 절집에는 근사한 말과 모습 무성했다. 승복에 미련이 없었다. 내가 찾는 게 없었으므로. 


그리고 마음수련 명상을 만났다. 2013년도 가을이었다. 명상을 하는 내내 강렬했다. 자유로웠다. 마음수련 메인센터 근처에 거처를 잡고  병원에 취직했다. 병원에서 시설 관련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7년이 지났다. 


마음수련은 '인간 마음을 우주 마음으로 바꾸어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 수련할 때 '정말 그렇까?' 궁금했다.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버린담? 하지만 마음수련을 창시하신 우명 스승님은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라고 하셨다. 진짜가 되지 않으면 마음수련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요즘 나는 진짜 명상을 시작했다. 일상에서 하는 명상이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당신은 인간 마음을 끊으셨나요? 우주 마음이 되어 영원히 살고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어떻게 증명할까? 결과가 증명한다. 나는 걱정, 근심, 스트레스가 없다. 정말이다. 일상에서 무수한 깨침과 지혜가 일어나고 있다.  <가짜인 나>로부터 결별하고 있는 중이다. 


감사함 뿐이다.                                                                                                                                          

깨달음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아무리 다가가도 붙잡을 수 없는 초월의 세계가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와 하나 됨으로써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입니다. 어떠한 힘 앞에서도 부서지지 않는 그 무엇, 겉 거죽의 나보다 훨씬 위대한 그 무엇에 연결된 상태입니다. 내 이름과 모습 뒤에 숨어 있는 본래의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은 엄청난 고통임에도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생각의 행렬이 소음이 되어, 내면의 고요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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