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도 사치인 순간

아이를 품은 서른아홉의 무거운 몸뚱이여서

by 고민베어 이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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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퉁부은 얼굴이 거울 속에 한가득이다. 사람 하나를 품는 일이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이질감을 안고 있어야 하는 일인 줄 몰랐다. 첫째 때도 이랬던가, 나와 똑 닮은 여덟 살 아이를 한없이 쓰다듬으며 기억을 더듬어본다.


세상을 비집고 나오는 아기는 엄마 자궁을 비집고 자기 자리를 늘려본다. 손가락 만한 주먹으로 퉁퉁 치고 발로 꾹꾹 눌러보고, 시간을 찢고 공간을 베어내며 온 몸을 들이밀어본다. 엄마 뼈와 살은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관성을 이기지 못해 통증에 허덕이고 집이 비좁은 아기는 갑갑함에 잠을 이루지 못해 팔다리를 휘저어본다.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일이야, 사람 하나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이렇게 지치는 시간의 연속이라는 것을 왜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것인가.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지.


(특히) 뱃속에 있을 때의 모성애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모성애도 사회적 학습이며 이데올로기라 정의한다. 낳고도 쉽게 버리고 애틋하게 키우지 않던 옛 시절의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이 생명을 사랑해주어야 해 사랑해주어야 해 되뇐다. 비싸디 비싼 초음파로 손가락 발가락 있는지 들여다보고 또 보고 거기 진짜 있나 확인시켜준다. 그나마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상호작용을 이끌어내야 하니까. 아프고 지치는 임신기간에 모성애의 책임감을 지워주어야 하니까.


태생 전에 시작되어 희생을 강요당한 모성애는 아이가 사회적으로 성공해 갚길 바라는 마음으로 삐뚤게 자란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일이야, 무조건 공부를 해서 의사 검사가 되어야 행복하게 잘 산단다. 지금 힘들어도 나중에 잘 되면 그 때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아이를 부모가 희생한 만큼의 가두리 속에 가두어 키운다. 자식에게 바랬던 마음이 기대에 못 미치면 대를 이어 손자 손녀에게까지 뻗친다. 누구의 행복을 위한 욕심일까. 어디서부터 잘 못 끼워진 단추일까.




나의 진짜 모성애는 직접적인 상호작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픈 아기를 끌어안고 함께 아프고, 그럼에도 버텨내는 작은 호흡을 기특하게 어루만지면서. 아직 초점도 안 맞는 아가가 사라졌던 엄마를 보고 울컥 화를 내며 울더니 엄마 품에서 세상 편안한 표정으로 잠드는 것을 신기하게 토닥이면서. 내가 이석증으로 아기를 안고 있다 같이 쓰러지면서 아이가 대리석 거실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순간부터. 통곡을 하며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 나서야 아가가 눈 앞에 없는 매 순간마다 얼굴이 어른거리고 가슴이 미어져 온다.


사실 첫째가 태어나 (언어가 완성되기 전인) 네 살 이전까지는 뱃속에서의 기억을 얘기하곤 했다. 너무 배고프고 힘들었다고. 빨리 세상으로 나오고 싶었다고. 이론적으로 4세 이전까지의 기억들은 언어화되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에 자리 잡는다고 했는데, 막상 그 기억이 뱃속의 기억 까지라니 흠칫 놀랐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뱃속에 있을 때 더 잘할 걸, 그런 생각을 했었다. (대체 뭘 더 잘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막상 둘째를 가지고 고통스러운 8개월을 버티다 보니 모성애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나친 엄마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으로 나오기 위한 통로를 열기 위해 아기도 애를 쓰고 있지만 엄마 또한 고통스럽도록 열 달 동안 자신의 몸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태어나기 전, 뱃속에 있는 시간은 가냘픈 아기와 엄마의 관계보다는 대등한 영혼 대 영혼으로서의 접점의 시기가 아닐까.


첫째에게 다 쏟아붓는 너무도 큰 사랑을 어찌 나누어주어야 하나 싶고, 아직 낳지도 않은 둘째에 대한 모성애를 강요받을 때마다 또 어찌해야 하나 싶다. 이런 건 책에서도 연구실에서도 배운 적이 없는데, 삶이란 참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살아가는 것이 참 고달프고 어려운 일이어서, 낳고도 키우면서도 수천만 번 미안하다고 밤을 지새워 속삭였었다. 그래도 같이 겪고 같이 아파줘서 고맙다고, 매일 그만두고 싶은 삶을 토닥여주는 네가 천사라고. 나는 또 한 명의 천사를 얻게 될까, 마음이 만 갈래로 갈기갈기 나눠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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