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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베어 이소연 Mar 15. 2024

[폭식증 책리뷰] 이것도 제 삶입니다

섭식장애의 길, 사춘기 한가운데 어딘가


난도질된 그 길 위에서


저자는 15년동안 섭식장애와 함께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안에서 살고 있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섭식장애와 함께 공존하는 삶 자체를 인정해주기를,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섭식장애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저자는 상처받은 마음을 낱낱이 그려내고, 살점을 도려내듯 아픔을 파내어 책장 한 장 한 장에 올려놓았다.


책을 읽는 동안 섭식장애 속에서 가라앉아 있었던 우울함과, 무거움으로 다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섭식장애의 인과관계를 눈에 그리듯 볼 수 있었음에도, 책을 덮고 일어서며 남는 이 무겁고 불편한 여운은 무엇일까 궁금하게 만들었다.

고민베어는 깨방정인 이유


고민베어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은 섭식장애의 양성화다.


섭식문제 속에서 갇혀 어둡게 침잠하는 것에 공감하고 동의하기보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영위하고 있는 우리의 일상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잠시라도 갖는 긍정적이고 밝은 시간들에 집중해 그 짧은 순간들을 확대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섭식장애에서 벗어나고 보면 그렇다. 그 안에 있을 때에는 마음의 문제가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내 마음의 문제는 외부로 인해, 부모와 사회로 인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사회와, 바꿀 수 없는 어린시절 내 부모와의 관계를 바라보며 자신도 바뀔 수 없다고, 나을 수 없다고 결정내린다.



중2병과 섭식장애의 관계


나도 그랬듯이, 저자도 책을 좋아했다.


내가 궁금해하는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똑똑한 대답을 해주었고, 어른들이 귀찮아하는 모든 영역(사실은 어른들도 모르는)에 대해 알아낼 수 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침잠해도, 우울해도, 어두워져도, 내 사고의 틀 속에 갇혀 헛소리를 해도 되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 속에 갇혀버린다. 내가 똑똑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내 논리의 오류에 갇힌다.


이를 나는 중2병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 기준을 만들어내기 위해 중2병이, 사춘기가 와서 부모와 세상에 반항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사춘기는 내 세상에 갇혀 내 기준을 만들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가둬두는 시기이고, 섭식장애 또한 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내 멋대로 먹지 않고, 내 멋대로 먹고, 구토하거나 뱉음으로써 엄마의 ‘그만 먹어’ 혹은 ‘더 먹어라’ 지시에 반항하면서 내 멋대로 통제하는 힘을 맛본다. 특히 어린 시절 학대받았거나, 너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면서 본인의 통제력을 감각해보지 못한 경우에 가장 쉽게 온다. 내가 먹고 먹지 않는 것은 아무런 힘도 통제력도 없는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므로.


내 스스로 섭식장애에 나를 가두는 것이다. 나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억압받고 학대당하면서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식으로.


물론 중2병 따위의 말은 내가 섭식장애에 10년 간 갇혀있던 장본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섭식장애 치료가 자의적으로 선택되어야 하는 이유


책 속에서, 섭식장애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래서 ‘외부의 의지’로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사춘기 때 중2병 안에 있는 아이들을 윽박질러 밖으로 꺼내려고 해봤자 반항이 돌아올 뿐인 것처럼, 섭식장애도 똑같다.


저자는 수없는 치료를 받았지만, 스스로 찾아간 적은 없다.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끌려가서 ‘당하게'된 치료가, 수도 없이 반복된 그 치료적인 행동들이 사실은 섭식장애 안에서 더욱 갇혀버리게 되는 굴레가 아닌가 한다.


섭식장애는 보통 스스로의 통제력을 시험해보고, 느껴보기 위해서 시작된다.

다이어트를 통해 내 몸을 마음대로 바꿔보기 위해.

부모님이 먹으라고 하는 지시에 반하기 위해.

살찐다, 먹지 말라고 하는 지시에 반하기 위해.


마음껏, 할 수 있는 만큼, 이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 통제욕구를 발휘해보고 나서야,

그리고 나서 내가 스스로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 즈음에야,

누군가의 도움이라도 받아서 이제 다른 방식으로 통제력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야


그 때 쯤 되어야만 치료는 의미가 있다.

마치 사춘기를 충분히 겪어야 어른이 되듯이.

통제력이 갖고 싶어서 시작된 것을, 치료라는 통제하에 다시 가두는 것은 정말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아닌가.


치료에 대한 의지가 분명할 때, 마음의 치료보다는 몸의 정상화가 먼저다. 이미 엉망이 된 호르몬과 대사를 끌어올리지 않는 한 마음을 끌어올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심리상담과 섭식장애 상담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계속하려고 한다. 쉽지 않은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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