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딴루 (지은이), 에드워드 양 (원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 이 소설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소설보다는 영화가 주제의 깊이를 잘 보여주기에, 리뷰는 영화를 중심으로 씁니다.
후세의 평화를 위하여 기꺼이 역사의 어둠을 견뎌냈던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바친다.
Edward Yang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우딴루 (지은이), 에드워드 양 (원작), 북로그컴퍼니
대만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우딴루는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썼다. 소설책을 펼치면 맨 앞장에 '에드워드 양' 감독의 헌사가 위와 같이 적혀있다. '1959년 여름'이라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감독이 적시한 시대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이다.
대만의 1950년대는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장제스의 국민당을 좇아 대만으로 이주해 온 일명 '외성인'과 원래부터 대만에 살던 '본성인'의 대립으로 촉발된 2.28 사건은 대만을 무자비한 백색테러의 무대로 바꾸었다. 섬나라였기에 피할 곳 없던 사람들은 고스란히 폭력 앞에 스러져갔다. 우리나라의 4.3 사건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이었다. 샤오쓰의 아버지가 정보기관에 끌려가 진술서를 쓰는 장면은 오랜 독재와 매카시즘 열풍과 백색테러의 역사를 거친 우리에게도 결코 낯선 광경이 아니다.
이 영화는 1961년 타이베이 시의 고령가에서 한 소년이 소녀를 칼로 찔러 죽인 대만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건 자체에만 중심을 둔다면 이 영화는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러닝 타임이 무려 3시간 57분. 그러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화면의 무게감과 자기 방식으로 난폭한 시대에 맞서는 인물들의 일상을 좇다 보면 상영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경우가 많지 않고, 때로는 모습이 감춰진 채 목소리만 들리기도 하며, 빛과 어둠으로 이분되는 화면 배치 등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시대의 어둠 속에서 인물 개인은 중시될 수 없음을, 때로는 흐릿하게 때로는 아예 가려진 채 어둠 속에 잠길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내성적인 듯하나 대담하기도 하고 감성적이기도 한 소년 장첸의 반항기 어린 얼굴과 밍의 매력 넘치는 모습이 먹먹하게 오래 기억될 영화.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언젠가 당신의 고전 열 편에 들고야 말 걸작, 혹은 이미 그런 까닭>이라는 글에서 이 영화 속 두 인물, 아버지와 샤오쓰를 사로잡은 것은 '불안'이라고 진단한다. 독재 권력의 전략이 작동되는 공간에서 긴장과 불안이 어떻게 일상생활 안으로 스며드는지를 응시한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영화 속 아이들은 폭력조직을 결성하고 지역의 깡패집단과 연합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거칠다. 출신계급을 벗어나는 방편으로 공부가 유용했던 시절에 성적이 부족하여 야간반에 편성된 샤오쓰를 흔든 건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정성일의 진단을 차용하자면 소년의 절망감이 '불안'을 부추겼을 것이고 출구를 찾지 못한 불안이 밍이라는 잘못된 분출구를 향한 것이라 생각된다.
내기 당구에 빠진 샤오쓰의 형과 종교에 몰입하는 작은 누나와 정보기관에 끌려갔다 온 후 정신병적 징후를 보이는 아버지 등 샤오쓰를 비롯한 가족들의 삶은 불안하게 흔들린다. 샤오쓰의 부당한 근신 처분 앞에 분노하며 '난 이번 사건을 통해 네가 충격을 받기보다는 용기를 냈으면 좋겠구나. 네 꿈은 네가 만드는 거야. 노력하기에 달렸지.'라고 희망을 말하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희망은 독재권력의 폭력 앞에 볼품없이 무너져 내린다. 어둠의 시대를 맨 몸으로 견뎌야 했던 부모 세대에 대한 감독의 연민에 찬 눈길이 느껴지는 에피소드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소품으로, 휴대하기엔 너무 큰 손전등이 있다. 빛보다 어둠이 자주 깔리는 화면에서 빛을 비추는 손전등의 역할은 그 자체로 두드러진 상징성을 갖는다. 나중에 샤오쓰는 손전등을 집어왔던 영화 촬영장에 다시 손전등을 놓아둔 채 나온다. 이후 거리에서 만난 밍을 살해한다. 좁게나마 빛을 주던 손전등을 놓아버리는 모습에서 희망이 사라진 샤오쓰의 내면 풍경을 어림할 수 있다. 그래서 자포자기 속에 살인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닌지.
그리고, 밍. 병든 어머니와 더부살이로 전전하는 일상은 그녀의 매력적인 외모마저 무기화한다. 그 무기에 기대 어린 소녀는 거친 세상을 온몸으로 헤쳐 나간다. 그녀는 말한다. 남자들은 나를 좋아하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함께 해주지 않는다고. 결국 그녀는 '내가 평생 곁에 있을게. 내가 지켜줄게!'라고 외치던 샤오쓰의 칼에 난자당한다.
대만의 1950~60년대 사회적 혼돈은 아버지들을 정신적으로 압박했고 소년들을 폭력에 의존하게 했으며 어린 소녀들의 생존권을 박탈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가 전혀 낯설지가 않다는 사실이 우리의 큰 어둠이며 슬픔이 아닐는지….
(*표지 이미지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