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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l 23. 2024

슈퍼스타 김도영

김도영이 사이클링히트를 했다. 파워도 있고 발도 빠르니 언제 해도 할 거였다. 사이클링히트 자체는 놀랍지 않았는데 정말 놀랐던 것은 세번째 타석의 3루타였다. 전 타석에서 우중간 큼직한 타구를 날렸지만 NC 외야수들이 공을 더듬는데도 3루까지 가지 못했다. 너무 일찍 2루타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주루를 했기 때문에. 해설진들도 김도영을 나무랐고, 3루 주루 코치 또한 마치 그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한 장면이 중계에 포착됐다. 그런데 그 다음 타석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타구에 김도영이 2루를 지나 3루까지 내달리는 게 아닌가. 아니, 아무리 발이 빨라도 그렇지 3루와 가까운 좌중간 코스인데.. 그런데 결과는 여유있게 세입이었다. 마치 보란 듯이 3루타를 만들어버리는 김도영을 보고, 실력 뿐만 아니라 승부욕까지 슈퍼스타의 그것이라고 느꼈다. 역대 2번째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1루타-2루타-3루타-홈런 순으로 사이클링 히트를 치는 것), 역대 최소 타석(4타석)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롯데 김응국은 5타석 만에 달성) 같은 건 그냥 양념.  


김도영의 미친 성적. IsoD%(순출루율)이 낮은 건 타율이 너무나 높기 때문. P/PA(타석 당 투수구) 또한 적극적인 타격을 하는 김도영의 성향 때문. 출처: 스탯티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은 활약에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진도 얼어붙었고, 스포츠기사는 제목만으로도 놀라움을 표했다. "미쳤다" "천재" "야구 만화인가" "역대급 재능" 이런 과한 수사들이 오히려 겸손해 보일 지경이다. 그중에서도 "만화"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만화라... 야구를 포함한 스포츠 만화의 주인공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구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타고난 천재들이 계속 잘하는 이야기 혹은 노력하는 언더독이 마침내 꿈을 이루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전자는 <H2>의 히로와 히데오, <슬램덩크>의 서태웅 같은 선수들이다. 후자는 <4번 타자 왕종훈>의 왕종훈, <내일의 죠>의 허리케인 죠, <슬램덩크>의 강백호 같은 이들이다. 무협지까지 범위를 넓히면 전자는 <신조협려>의 양과와 <의천도룡기>의 장무기, 후자는 <사조영웅전>의 곽정이려나. 아무튼 거칠게 이렇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천재들도 노력하고, 언더독들도 잘 알지 못했지만 사실은 타고난 재능러들이라는 점. 결국 주인공이 되려면 타고난 재능도 필수고 남다른 노력도 필수다. 결국 세상은 재능도 타고났는데 노력까지 하는 천재를 이길 수 없다.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센까와 고등학교 야구 서클에 만족해야지, 갑자원 우승하려면 결국 히로처럼 타고난 재능러에 노력하는 근성의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 거다. 


만화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더욱 냉혹하다. 한 해에 1000명이 드래프트에 도전하고 그중 100명만 프로의 지명을 받는 프로야구. 노력은 디폴트인 세상에서 결국 클래스를 결정하는 건 냉혹하게도 타고난 재능이 된다. 게으른 천재는 성공할 수 없지만 노력까지 하는 천재를 이길 수 있는 노력형 언더독은 없다. 물론 현실에서도 노력형 슈퍼스타들이 있다. <4번 타자 왕종훈>에 이름을 빌려줬던 빙그레 이글스의 홈런왕 장종훈은 연습생 출신이었다. 그는 김봉연, 이만수, 김성한 등 80년대 홈런 타자를 가뿐하게 넘어서는 파워로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40 홈런 시대를 열어젖혔다. 최형우도 노력형에 대기만성형이다. 삼성에 포수로 지명되었지만 방출된 뒤, 경찰청팀에서 외야수로 전향해 타격이 만개해 지금까지 롱런하고 있다. 역대 최다 타점, 최다 루타를 기록하고 있는데, 올시즌엔 40대에 커리어 하이 타점을 기록할 모양이다. 박병호의 경우엔 프로에 와선 대기만성이었지만 성남고 시절부터 초고교급 타자였으니 언더독 느낌보다는 방황하던 천재에 가깝다. 


신기한 게 타자 쪽에서는 장종훈이나 최형우처럼 언더독 노력형 슈퍼스타가 있지만 투수 쪽에서는 슈퍼스타는 죄다 재능러들이다. 역대 누적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20위를 살펴보면 선동열, 양현종, 김광현, 송진우, 이강철, 정민철, 임창용, 조계현, 윤성환, 한용덕, 류현진, 김용수, 손민한, 정민태, 윤학길, 최동원, 김시진, 니퍼트, 장원준, 배영수. 이중 장종훈처럼 연습생 출신 혹은 최형우처럼 방출되었던 선수는 없다. 타자 쪽에서 장종훈이나 최형우 같은 예외가 있을 뿐, 현실세계의 주인공들은 죄다 타고난 천재들이다. 드라마로 치면 언더독의 지구 정복이 더 극적이지만, 창작물이 아닌 현실세계에선 타고난 천재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이 더 흔하게 일어나는 드라마다. 아니, 이것도 흔한 건 아니다. 천재가 잘하는 걸로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자아내는 천재는 단순히 잘하는 걸 넘어서서 사람들의 감각에 깊은 충격을 새겨야만 한다. 올스타급 선수, 국가대표급 선수를 우리는 응원하지만 그 플레이에서 충격과 감동을 받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리그를 지배하고 생태계를 교란하고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그래서 팬들을 열광시키는 슈퍼스타의 등장을 늘 기다린다. 


NBA로 치면 마이클 조던, 전성기 때 듀란트, 3점슛 시대를 열어젖힌 커리, 말도 안 되는 꾸준함(MVP급으로 꾸준함이다)의 르브론 정도. 앞으로 성장치에 따라 웸반야마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KBO에서는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선동열, 이종범, 이승엽, 류현진, 테임즈 정도라고 생각한다. 양현종, 김광현, 최정, 양준혁 또한 팬들을 열광시키는 최고의 선수지만 게임체인저, 리그파괴자라는 측면에서는 앞의 네 선수보다 강렬하지 않다. 꾸준함은 스포츠 선수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점에서 뒤의 네 선수가 어떤 면에서는 앞의 네 선수보다 더 위대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앞의 선수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압도적인 선수, 게임 체인저이자 리그 파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선수가 등장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문김대전의 주인공으로 전국의 야구팬들의 주목을 한껏 받았고, 신인 시절에 무난한 가능성을 보이고, 2년 차 시즌에는 남다른 적응력을 보이더니, 3년 차인 올해에는 MVP급 시즌을 보내고 있다. 입이 떡 벌어지는 김도영의 놀라운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비에선 아직 미숙함을 보이지만 컨택, 파워, 주루를 모두 갖춘 역대급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이것저것 다 잘하는 선수는 그래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이것저것을 각각 최고 수준으로 잘하는 선수는 이종범 이후 처음인 거 같다. 기아 타이거즈엔 악마와도 같았던 이정후의 컨택 능력, 강백호 드래프트로 불릴 정도로 타고난 역대급 타격 재능러인 강백호의 파워, 메이저리그에서도 탑급으로 평가받는 주루까지. 각 분야 중 하나만 해당되어도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고 MVP 수상도 적어도 한 번은 할 수 있을 텐데, 이 모든 걸 한 선수가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례로 3,4,5,6,7월. 7월은 경기수가 아직 적어서 누적은 약해 보이지만 비율을 보면 삼진 대비 볼넷이 꾸준히 늘면서 출루율이 급성장


더욱이 놀라운 것은 김도영의 성적의 디테일이다. 7월 23일 기준으로 타율 3위, 최다안타 2위, 홈런 2위, 타점 9윌, 득점 압도적 1위(역대 한 시즌 최다 득점 페이스), 도루 6위, 출루율 3위, 장타율 1위, OPS(출루율+장타율) 1위, wRC+(리그 평균 대비 득점 창출력)1위,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1위니 표면적인 성적만으로도 올시즌 최고 선수임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94년, 97년의 이종범, 15년의 테임즈처럼 언아더 레벨 정도는 아니다. 비인기팀에 외국인 선수여서 그렇지 KT 위즈의 로하스 또한 도루와 득점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김도영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중이니까. 김도영의 대단한 점은 이번 시즌 누적과 평균 성적이 아니라, 월별 성적을 볼 때 더욱 드러난다. 아직 3년 차밖에 안 된 젊은 선수이다 보니 계속 성장 중인데, 그 성장 폭이 한 시즌 안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급격하다는 것이다. 


4월의 김도영은 무서운 타자였지만 약점이 없는 타자는 아니었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서 월간 MVP를 받았지만 타격은 언제든 감이 안 좋아질 수도 있다. 4월에 폭발한 후 각 팀은 김도영을 현미경으로 분석해 약점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투수들은 김도영이 잘 치는 빠른 공을 던져주지 않고 바깥쪽 낮은 코스로 느린 변화구만 주야장천 던져댔다. 그런데 김도영은 어느 순간 변화구에 적응했고, 홈런에 비해 2루타 생산이 좀 떨어진다 했는데 어느덧 20개로 2루타 11위가 되었고,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높지 않다고 했더니 선구안을 장착해 볼넷이 늘어 출루율이 이젠 3위다. 투수가 어렵게 승부하면 욕심부리지 않고 볼을 골라내 볼넷으로 출루한 뒤 도루를 하거나, 후속타자의 1루타에도 1루에서 홈까지 파고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정면 승부하면 김도영에게 장타를 맞는다. 장타 맞을까 봐 내야수들이 깊게 수비 위치를 잡으면 기습 번트를 대 버린다. 


나는 내가 살아생전에 이종범 같은 플레이를 하는 선수를 또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종범 보다 안타를 잘 치는 선수도 있고, 이종범보다 홈런 많이 치는 선수는 많았고, 이종범만큼 도루 잘하는 선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이 모든 것 최고레벨에서 하는 선수는 이종범 말고는 없을 줄 알았다. 강정호는 홈런은 더 많이 치고 발도 느리진 않았지만 이종범만큼 준족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음주운전 은폐 등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이자 리그의 아이콘이 되기에는 인간적으로도 결격 사유가 많다. 현대야구에서 4할 타자가 왜 실종되었고 다시 등장하는 것이 불가능한지를 통계학적으로 증명하는 책 <백인천 프로젝트>에서 야구광들이 내세운 94년 이종범에 대해 일군의 통계광들이 그 정도의 플레이어는 계산해 보면 통계적으로 40~50년 정도에 한 명 꼴로 나올 수 있으니 이종범의 등장은 그다지 예외가 아니라고 했을 때, 나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그런데 이제 김도영 때문에 마음으로도 납득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종범신은 유일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양신도 있지만 양신은 달리기를 못하니


게다가 슈퍼스타의 자질 중 하나인 이슈 메이커. 이건 정말 어떤 통계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이 작동하는 게 아닌 영역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기아나 엘지, 롯데처럼 거대한 팬덤을 가진 팀의 선수들이 뉴스 메이커가 되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인기팀 선수들이 이득을 본다고 모든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아니다. 견실하고 꾸준하고 대단한 활약을 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다. 당장 NBA만 보더라도 보스턴의 제일런 브라운 같은 선수들은 그의 실력에 걸맞은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김도영은 뭐를 하든 뉴스가 된다. <H2>에서 스포츠 기자인 히까리의 삼촌이 히까리한테, 히로는 동네야구를 해도 뉴스가 될 거라고 말하는데 딱 그 꼴이다. 지금은 MVP에 이름 세기고 있지만, 작년만 하더라도 김도영은 올스타전도 출전 못했다. 다른 선수들은 올스타전 나가는 그 타이밍에 김도영이 청승맞게도 비 맞으면서 싸이 감성 돋는 글과 사진을 스레드에 올렸는데 그게 크게 회자되면서 온갖 해설위원이 맨날 "그런 날" 드립을 치고, 회사 들도 광고에 "그런 날" 드립치고 하여간 어마어마하게 이슈가 되었다. 


굿즈 같은 거 안 사는 나도 이건 사고 싶었음


누구누구의 시대. 상투적인 표현이 어디에선 재밌겠냐만 스포츠 영역에선 유독 상투적인 미사여구가 많다. 누구누구의 시대라는 표현 또한 그렇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김도영의 시대가 막 열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는 상투성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진다. 마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현장처럼, 역사책의 한 장면을 내가 목격하고 있다는 설레는 감정이 든다. 게다가 더욱 소름 돋는 건 여전히 발전 중인 김도영의 영광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점. 이 선수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무척 궁금하다. 그런데 김도영의 영광의 시대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볼 수 없을 거 같다. 메이저리그에서 또 다른 만찢남, 정말이지 차원이 다른 슈퍼스타 오타니와 대결하고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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