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Sep 19. 2024

찬란한 멸종

짧은리뷰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해보고 싶은 게 많은데 그중 하나가 과학공부다. 지금 해도 되지 않냐고? 물론 지금 해도 된다. 그리고 실제로도 하고 있다. 아주 각 잡고 하는 건 아니지만 나름 과학책도 읽다. 공부가 뭐 별 건가. 내가 과학자로 돈벌이를 할 것도 아니고 그냥 나 재밌자고 하는 공부인데.


과학의 모든 분야에 관심 있는 건 아니다. 뇌과학, 천체물리학, 로봇공학 이런 거 관심 없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는 과학사, 특히 과학기술사와 자연사다.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감옥에 수감되었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찰스 다윈의 책과 스티븐 제이굴드의 책(야구 때문에 읽는 것 아님! 물론 야구 때문에라도 읽을 생각이긴 하지만)을 읽을 거다. 지금 읽어도 되지 않냐고? 물론 그래도 되지만 그럴만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대신 이정모 선생님의 새책 <찬란한 멸종>을 읽었다.



다섯 번의 대멸종과 여섯 번째 대멸종


이 책은 지구 자연사에 존재했던 다섯 번의 대멸종과 현재 진행 중인 여섯 번째 대멸종을 각각의 역사적 증인의 입장에서 보여준다. 물론 화성 로봇과 범고래와 네안데르탈인과 스밀로돈(고대 거대고양이)과 미토콘드리아가 말을 할 순 없고, 저자가 각각의 존재에 빙의(?) 되어 대멸종의 자연사를 소개하는 형식이다.


자연사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읽다 보면 처음 보는 동물 이름과 어렵게만 느껴지는 과학 이론들이 등장하지만 나는 그냥 읽고 넘겼다. 수능시험 볼 것도 아니고, 필요하면 검색하면 되는 세상에서 이런 걸 달달 외울 필요가 있나. 이렇게 읽어나가니, 고등학교 때는 참으로 친해지기 힘들었던 미토콘드리아도 친근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다섯 번의 대멸종은 모두 (지구의 시간 감각으로 봤을 때) 급격한 자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들은 멸종하게 된 사건이고, 그렇게 여러 생물종이 멸종하면서 새롭게 생긴 생태계의 틈새에서 새로운 환경에 맞게 진화한 새로운 생물종들이 탄생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대멸종을 수차례 겪어온 지구의 역사라는 것이다. (라이온킹의 주제곡 'Circle of life' 가사 같은 내용이랄까)


그런데! 화산폭발이라든지, 소행성 충돌이라든지 어떻게 막거나 해결해 볼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 급격한 기후 변화의 원인이 된 다섯 번의 대멸종과는 다르게 현재 진행형인 여섯 번째 대멸종은 그 윈인인 기후변화가 바로 인간의 활동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 뭐 기후위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는 바 "창의력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별난 아이디어가 아니"고 "이미 있는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새롭게 조합해서 나오는 것이다"(154쪽).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대멸종의 자연사로 풀어내는 콘셉트가 무척 신선했다.


인류의 멸종과 화성개척 프로젝트의 실패라는 미래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 바다의 생성과 고원핵 생물의 등장까지 다루는 책인 만큼 잡다하고 재밌는 지식과 정보도 넘쳐난다. 딱 하나만 예를 들자면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두 인류는 일정 기간을 겹치며 지구에서 함께 살다가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 것인데, 공존하던 시기에 서로 유전자가 섞이기도 했다고 한다. 네안데르탈인이 사피엔스에게 남긴 유전자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전달되는데, 바로 비만과 탈모라는 것이다. 젠장. 아니, 그 많고 많은 특질 중에 왜 하필 비만과 탈모냔 말이다.


아무튼 지구 자연사의 대멸종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과학 이야기이고, 저자는 여기에 더해 기후위기라는 인류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화성 개척할 생각하지 말고 인류가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머로 말하기


이정모 선생님 글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특징은 바로 '유머'다. 이정모 선생님의 유머는 심각하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재밌는 이야기인 줄 알고 듣고 있었는데 다 듣고 나면 어쩐지 이야기 속에 뼈가 있달까. 이럴 때 유머는 그저 웃긴 이야기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힘에 가깝다. 방귀가 어쩌고 저쩌고 한참 떠들다가 마지막에 가서 대통령 탄핵 이야기로 슬그머니 글을 끝맺는 식이다. 방귀와 탄핵, 전혀 연결되지 않는 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웃다가 보면 어느샌가 현실정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유머의 근원에는 혐오에 맞서는 힘, 염세주의와 무기력에 맞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이들은 혐오와 차별을 유머랍시고 시전한다. 타인의 소수자성을 희화화하거나 조롱하는 식의 나쁜 유머들이 그렇다. 유머가 유발하는 웃음에는 여러 감정이 담길 텐데 이들이 구사하는 유머는 풍부한 인간의 감정을 담지 못한 채 말초적인 웃음거리에만 집착한다. 반면 좋은 유머에는 웃긴 포인트뿐만 아니라 슬픔, 아픔, 공감 같은 어찌 보면 개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감정도 풍성하게 담긴다. 코미디언들이 코미디 연기뿐만 아니라 정극 연기도 잘하는 건, 유머의 본질이 인간의 다양한 감정에 연결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유머가 넘치는 글은 읽는 사람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한다.


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유머가 제로인 사람들도 종종 만나게 된다. 웃기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사람들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머가 제로인 이들은 여유가 없는 이들, 품이 없는 이들이다. 이들은 세상을 바꾸겠다면서 인간에 대한 혐오와 냉소만 가득하거나, 가시적인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성만 돋보일 뿐 촘촘하고 복잡하게 작동하는 권력의 자장 안에서 분투하는 이들에 대한 존중이나 이해는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사회운동에 좀 더 많은 유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정모 선생님처럼 글을 써보려고 노력했다. 노력을 해보니 깨닫게 된다. 이정모 선생님의 글처럼 뛰어난 유머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순발력이나 개그센스 같은 것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해당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부를 열심히 해야 유머 넘치는 글도 쓸 수 있다. 역시 인생 날로 먹는 게 없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