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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Sep 24. 2024

챗GPT 시대의 병역거부 심사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심사할 수 있는가?

병역거부자들은 대체복무를 하기 위해선 대체역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때 대체역 심사위원회에 내가 어떤 양심을 갖고 있고 왜 병역거부를 하는지 진술서를 써내야 한다. 과거 병역거부자들이 병역거부를 하면서 소견서를 발표하곤 했는데, 과거 병역거부자들의 소견서는 한국 사회를 향하거나 스스로를 향하는 글의 성격이 강했다면 이 진술서는 대체역 심사위원이라는 명확한 독자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소견서는 이상하게 쓰든 혹은 쓰지 않든 손해 볼 게 없지만, 진술서는 대체복무 심사를 받기 위해서는 꼭 써야만 하고 이상하게 쓰면 심사에서 떨어지는 등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아래는 두 병역거부자의 진술서다. 


1) 
저는 OOO이며,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된 이유를 아래와 같이 진술합니다. 

저는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보면서 인류의 고통과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과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으며, 전쟁이 가져오는 비극적인 결과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이며, 저는 이러한 폭력과 갈등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병역의 의무가 국가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저는 인류애와 평화의 가치를 우선시하며, 무력 사용에 반대합니다. 따라서, 저는 대체복무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제 의사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고민과 성찰을 하였으며, 제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병무청에서 제 진술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대체복무 신청을 수용해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 
안녕하세요. 저는 OOO입니다. 본인은 동물권 활동가로서 동물에 대한 종차별과 폭력, 그리고 학살이 군사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저는 병역을 이행하는 것이 제 가치관과 윤리에 반한다고 판단하여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동물권은 모든 생명체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그러나 군사주의는 종종 폭력과 파괴를 정당화하며, 이는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군사적 행동은 종종 생명체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폭력적인 해결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군 복무가 제 신념과 상충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동물권 활동가로서 저는 동물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러한 활동은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군 복무는 이러한 제 가치관과 상반되는 행위로, 저는 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병역거부를 요청하며, 제 신념과 가치관을 존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 진술이 긍정적으로 검토되기를 바라며, 필요시 추가적인 설명이나 자료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번 병역거부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을 보면서 병역거부를 결심한 사람이고 2번 병역거부자는 동물권 활동가인데 동물권의 맥락에서 병역거부를 결심한 사람이다. 두 진술서 모두 자신이 병역거부를 하는 이유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이야기한다. 마치 AI가 쓴 것처럼. 


맞다. 두 진술서는 모두 챗GPT가 썼다. 물론 내가 간략하게 병역거부의 이유를 써넣으면서 진술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챗 GPT를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렇게까지 잘 쓸 줄 몰라서 깜짝 놀랐다. 물론 기술적으로 잘 쓴 글이지만 과거 병역거부자들이 쓴 소견서만큼 울림은 없다. 병역거부자들의 소견서는 논리적으로만 보면 군데군데 스스로도 채 소화하지 못한 설익은 주장이 비약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감정에 너무 깊게 빠져있는 경우도 있다. 기술적인 면만 보자면 챗GPT가 쓴 진술서보다 논리적인 정합성은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삶의 구체성이 담겨있고,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들이 난생처음 양심의 무게를 스스로 느끼며 쓴 글이다 보니 글 자체가 주는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병역거부자들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진심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힘이.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다. 그리고 챗GPT를 이용해서 진술서를 쓰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것도 아니다. 나는 AI 글쓰기에 대한 윤리적 논의를 할 만큼 AI를 잘 알지 못하고, 글쓰기 윤리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누군가 병역거부자가 챗 GPT로 소견서를 쓴다고 하면 그러지 마라고 할 것이다. 양심을 직면하는 일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니까. 내가 그 사람의 양심의 언어를 만들어 줄 수 없듯이 챗GPT가 그 사람의 양심을 언어화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공지능이 이렇게 깔끔하게 병역거부 진술서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세상에서 과연 대체역심사위에서 양심을 심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질문이다. 아니 질문을 가장한 타박이다. 챗GPT가 가르쳐주는 대로, 써주는 대로 진술서를 내면 무조건 통과할 거 같다. 삶에서 겪은 구체적인 사건 몇 개만 챗GPT에게 알려주고 진술서에 반영해 달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이미 논리적으로는 충분한 글이니까. 심사위원들은 이런 진술서에는 큰 반대를 하지 않고 인용을 할 것이다. (물론 챗GPT가 쓴 거라는 걸 알지 못한 채)  병역거부 심사에 정답이 있다면 챗GPT는 확실히 그 정답에 가까운 진술서를 탁월하게 써내는 거 같다.  


반면 인간 병역거부자들은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도 정답을 알고 있다. 어떻게 대답해야 재판에서 무죄를 받을지, 심사에서 통과할지 알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평화주의자였고, 모든 폭력에 반대하며,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내밀겠다고 대답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 병역거부자들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평화주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군대가 저지르는 폭력에는 반대한다고 대답하고, 나는 사회주의자라서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전쟁 준비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심사위원 중에는 사회주의자를 무슨 빨갱이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 때문에 자신의 솔직한 대답이 오히려 심사에 악영향을 끼칠 거라는 간단한 계산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 병역거부자는 자신의 양심에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렇게 오경택, 홍정훈은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고, 나단은 대체역 심사위원회 심사에서 기각되었다. 


AI의 말끔한 대답이 오히려 심사를 통과하고, 인간 병역거부자들의 (어떤 면에서는 너무 거칠고 논리적으로 허술할 수 있지만) 솔직한 대답이 심사에서 떨어진다면?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어떤 병역거부자들은 챗GPT에게 진술서를 쓰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좋게 보이진 않지만 내 감상과 별개로 분명히 그런 사람들도 생길 것이다. 챗GPT 시대에 과연 양심을 심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심사가 가능하긴 한 건가? 챗GPT가 쓸 수 있는, 더 잘 쓰는 진술서라면 과연 심사위원들이 심사할 고유한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나는 본래 양심을 심사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입장이고, 그 원칙이 달라질 것은 아니지만 챗GPT의 등장은 양심 심사의 불가능성에 대해 새로운 방향에서 질문을 던지는 거 같다. 


우선 최근에 산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를 읽어봐야지. 생각을 더 해보기 위해선 공부가 더 필요하니까. 그런데 아마도 여기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대체역 심사위원회는 아무런 생각이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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