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바로 말할 수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고 물으면, 글쎄 누구라고 대답해야 하지? 선뜻 답하기 어렵다. 좋아하는 배우는 여럿인데 누굴 뽑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지만, 데이터는 알고 있다. 드라마 출연작은 모두 봤고, 영화도 두 편 빼고는 출연작을 모두 챙겨본 배우. 김태리다. 김태리가 나온 신작 드라마 '정년이'를 봤다. 맛있는 음식은 아꼈다 마지막에 먹는 심정으로 '좋거나 나쁜 동재'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먼저 보고 '정년이'는 다 끝난 다음 몰아봤다.
결말로 갈수록 실망스러웠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김태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나희도처럼, '미스터 선샤인'의 고애신처럼 활기차고 발랄한 말괄량이 캐릭터로 시작했던 윤정년이 뒤로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집착과 고집을 부리며 민폐 캐릭터가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속상했다. 물론 드라마 속 국극 장면과 배우들의 소리 장면은 그 자체로 매혹적이었고 김태리의 목포 사투리 연기도 썩 괜찮았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에게 몰입하지는 못하는 드라마라니. 듀나나 오수경 같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부용이'라는 캐릭터로 상징되는 페미니즘 서사가 빠진 자리 때문에 정년이 캐릭터가 망가진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원작을 안 봐서 부용이가 어떤 이야기를 담당했는지 모르지만 꽤나 설득력 있는 비평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그럼에도였을까? 나는 주인공에게 몰입하지 못했지만 무척 흥미롭게 '정년이'를 봤는데, 내게 이 드라마는 윤정년의 도전, 성공과 실패, 우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극 중 여성국극의 대표배우 문옥경과 서혜랑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각자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였다.
문옥경과 서혜랑은 여성국극의 대명사다. 남자 주인공 '문옥경', 여자 주인공 '서혜랑'은 마치 NBA 하면 '마이클 조던'처럼 그 자체가 장르인 예인으로 묘사된다. 정상의 자리를 오래도록 지켜오고 있는 두 배우지만 둘의 욕망은 사뭇 다르다.
문옥경은 경쟁자조차 없고 더 이상 이룰 게 없는 여성국극을 지겨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늘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국극판 밖에서 다른 예술가 친구들을 만나고, 날것의 재능인 윤정년에게 푹 빠진 것도 윤정년이 성장해서 자신을 위협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차피 국극단 시스템 안에서는 날고기는 후배들조차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지 못하니 시스템이 통제할 수 없는 시스템 바깥의 재능에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윤정년이 신입단원 시험에 합격하도록 국극을 가르쳐주고, 대본을 구해주고, 곤경에 빠졌을 때마다 도와준다. 평소 후배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옥경이 윤정년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반면 서혜랑은 옥경의 관심을 받는 윤정년을 견제한다.
서혜랑은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 두렵다. 옥경이 변화를 갈구한다면 혜랑은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여성국극의 공주로 오래도록 머물고, 왕자인 옥경을 혼자 독차지하고 싶어 한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짓도 서슴지 않는다. 윤정년을 자극해 목이 상하게 만들고, 창고에 몰래 가둬 오디션을 못 보게 하려 한다. 변화가 두렵고,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두렵다.
옥경과 혜랑의 욕망은 정반대의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둘 다 최고의 정점에 머물고 있는 지금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는 불안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아니까 변화를 갈구하고,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화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둘의 욕망의 근저에는 불안이 있다.
옥경과 혜랑의 상반된 욕망은 기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옥경과 혜랑처럼 자기 분야에서 정점에 오랜 세월 머무르기는커녕, 정점까지 가보지도 못한다. 그러니 문옥경의 지루함도 서혜랑의 놓지 않고 싶은 열망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일상과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며 변화를 갈망하는 동시에,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현재를 부여잡는다. 누구나 나 자신의 마음속에 옥경과 혜랑이 어느 정도씩은 있되, 때에 따라서 혹은 사람에 따라서 옥경의 목소리가 좀 더 크거나 혜랑의 마음이 좀 더 크게 나올 뿐이다.
나는 어떨까? 나는 옥경과 혜랑처럼 정점에 오른 그런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쩌면 옥경과 혜랑이 국극을 해온 세월보다 더 긴 시간 평화운동을 해오고 있다. 둘만큼 열심히, 모든 걸 다 바치며 이 일을 해 왔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둘만큼이나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이 일을 좋아하며 해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 마음속에도 옥경과 혜랑의 욕망이 너무나 당연하게도 충돌하고 있다. 이 둘의 욕망에 주목해서 드라마를 봤다는 것 자체가, 내 마음속 옥경과 혜랑의 욕망이 자극되었다는 뜻이겠지.
그렇지만 내 마음속 옥경과 혜랑의 불안은 드라마 정년이 속 옥경과 혜랑이 느끼는 불안과는 다를 것이다. 최고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리가 지속될 수 없다는 옥경과 혜랑의 불안감 같은 것은 내게 없다. 변화에 대한 갈망과 이대로 유지하고 싶은 갈망, 이 둘을 자극하는 나의 불안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