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의 말들

짧은 리뷰

by 이용석

활동에 대해, 노동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못해봤다는 걸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나는 매 순간 진심으로 일했고, 일과 좋은 긴장관계를 가지기 위해 애썼는데 정작 일의 속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의 첫 일은 활동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전쟁없는세상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건 당시 내게는 '활동'이었다. 우리는 돈이 없기도 했지만 일부러 활동비를 주지도 않았고, 신생단체였던 전쟁없는세상은 한국사회에 대한 어떠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 자유로운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냥 우리끼리 하고 싶은 것에 몰두했다. 평화운동이 우리에게는 활동이었지 노동이거나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출판사에 들어갔다. 중간에 이직하면서 쉰 기간까지 포함하면 한 5년을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이때의 일은 명확하게 노동이었다.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였다. 첫 출판사에서는 어쩌면 책 만드는 일보다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했다. 회사가 책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기도 했다. 기획회의 한 번이 없었고, 스스로 써간 기획안은 아무런 피드백도 받지 못했으니까. 자연스럽게 나는 노동의 의미에 대해,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덕분에 다시 전쟁없는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과거와 다르게 내가 하는 활동이 일종의 임노동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자영업자면서 노동자로서의 이중 마인드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럭키비키한 사고방식으로 접근해 보자면 (전쟁없는세상은 활동가들이 최저임금을 받는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고 더 주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최저임금이 많이 인상되면 노동자 이용석이 환호를 지르고, 최저임금 인상폭이 아주 낮으면 자영업자 이용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어떤 도전 과제를 직면할 때면 전쟁없는세상의 조직적 성장과 동시에 거기서 일하는 나의 개인적인 안위를 함께 고민한다.


활동가는 노동자와 다르다고 굳게 생각하는 일부 활동가 선배들과 달리 활동과 노동의 긴장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여전히 나는 활동과 노동의 개념으로만 나의 일을 바라봤구나, 싶은 깨달음을 <일의 말들>을 읽고 얻었다.


그렇다면 활동은 뭐고, 노동은 뭐고, 일은 뭘까? 활동을 사회변화를 위해 하는 여러 액션이라고 생각한다. 직업적인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사회운동으로서 활동을 할 수 있다. 어느 시민단체 회원으로 여러 행사에 참여하는 A씨가 있다면, 그가 탄핵 집회에 가고 퀴어퍼레이드에 가는 건 노동이 아니라 활동이다. 하지만 전없세 활동가인 내가 탄핵 집회에 깃발 들고 가고, 퀴어퍼레이드 부스 참여하는 건 활동인 동시에 노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휴가도 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뭐가 어떻게 다를까? 활동보다는 노동과 중첩되는 게 많아 보이지만 백 퍼센트 포개어지지는 않는 거 같다. 자영업자와 고용된 노동자의 입장을 비교해 보면 어렴풋한 차이가 느껴진다. (물론 전통적인 임금노동 개념에서 탈피해 자영업자의 노동자성에 대해 주장하는 의견도 요즘에는 많지만) 아무래도 노동은 임금(혹은 프리랜서의 경우에는 작업비)이라는 금전적인 대가를 상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의 노동력을 금전적인 대가로 치환해서 이익을 얻는 행위. 반면 일은 꼭 그 대가가 금전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을 거 같다. 자기만족이라든지, 사회적인 인정 같은 것들. 물론 노동에도 이런 것들이 뒤따르지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금전적 보상이 노동에서는 가장 중요한 반면 일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다.


그렇게 보자면 활동가라는 직업은 노동과 활동이 중첩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노동의 성격에 더해 일의 성격도 무척이나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큰돈을 벌 수는 없고, 자기만족이나 사회적인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활동가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일의 특성이 그런 사람들을 모으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자기 일을 무척 사랑하고, 동시에 일을 미워하기도 하는 거 같다. 돈도 별오 안 되는 일,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고, 다만 돈만 안 되는 게 아니라 기대했던 가치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일을 미워하게 되는 게 아닐까.


저자 황효진 님은 전형적인 시민단체에서 활동해 온 것은 아니지만 넓게 보면 극단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들보다는 어떤 사회적 가치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려고 하는 업계에서 주로 일해오신 거 같다. 언론사라든지, 커뮤니티를 만드는 지금의 일도 그렇고, 프리랜서로 하는 다양한 작업들도. 나와 같은 활동가는 아니지만, 여러모로 활동가들의 일과도 겹치는 게 많은 거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자신의 일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들, 거기서 뽑아 올린 통찰들이 크게 다가왔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일이 나를 괴롭히는 상황에 대한 통찰들, 일과 나의 건강한 관계 맺음에 대한 여러 고민들, 내가 지금 일하는 데 있어서 나에게 필요하다고 느끼고 부족하며 채워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지점들을 다른 이의 문장으로 만나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그중 몇 가지만 기록해두려고 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하니까.


완전히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라기보다는 소진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이 유지되는 것.

번아웃이 진짜 무서운 건, 일하느라 자신을 태워 없애면서도 일만이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33쪽)


바쁘다는 건 지금 내가 무리하게 일하고 있다는 증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내가 뛰어난 노동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뛰어난 노동자가 될 필요도 없고 말이다. (35쪽)


아는 사람은 다들 잘 알겠지만 나는 일중독과는 거리가 멀고, 일하는 것보다 더 노는 걸 좋아하고, 일하는 것만큼이나 열심히 논다. 예전보다 업그레이드 돼서 이젠 혼자서도 잘 논다. 그럼에도, 그렇다고 번아웃이나 바쁨에서 자유롭진 않다. K노동자니까. 과로의 진짜 무서움은, 특히나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은 경향이 강한 활동가들이라면, 과로 자체를 의미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몸이, 마음이 신호를 보낼 때마다 위 문장을 팔뚝에 한 번씩 써야겠다.


일에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일을 끊임없이 벌이는 것 역시 일종의 도파민 중독이다. 무엇에도 중독되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일이 주는 자극에 중독돼 있었다니. (37쪽)


나 또한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고 산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노는 걸 좋아하지만 두루 넓게 좋아하고 한 분야를 덕후들처럼 파고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또 도파민에는 무척 약하다. 자극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그 자극이 꼭 MSG맛 자극일 필요는 없지만, 심심한 맛이라 할지라도 더 좋은 맛을 찾을 때 느끼는 희열 같은 도파민을 늘 바란다. 일을 할 때도 꼼꼼하게 마무리 짓는 것보다는 새로운 일 벌이는 걸 좋아하는데 이게 도파민 중독과 연결될 거라곤 생각 못해봤다.


자주 대화하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경청하고, 거기에 의견을 보태고, 이 아이디어를 함께 더 낫게 만들었음을 인정하기. '전략'이라고 표현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 간의 '돌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 같다. (47쪽)


내가 생각하는 피드백이란, 잘해 내지 못한 일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는 것이다. 내가 당신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잘하는 걸 알고 있으며 더 잘할 수 있게 돕고 싶다고, 어떻게 더 낫게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있다는 리액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177쪽)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관계에 대한 통찰이 특히나 가슴에 와닿았다. 어쩌면 내가 요즘 이 부분에 무언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일지도. 그런데 협업은 꼭 활동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의 기본값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새겨야 할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게 가속화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필요한 인간의 일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photo_2025-06-13_11-31-03.jpg


어디선가 읽었는데 좋은 연애 관계는 늘 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인지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렇담 일과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언제든 이 일을 그만둘 수 있다는 것, 전쟁없는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 평화활동가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둘 때 나는 내 일과 좋은 관계를 이어가겠지. 이 책의 문장들을 자주 꺼내 읽어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노동자가 만난 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