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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한문 수업

짧은 리뷰

by 이용석

계획형 인생이 아니다. 큰 방향은 늘 고민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체계적으로 계획을 짜고 그러진 않는다. 굵직한 방향이 맞다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무수한 우연들에 내 몸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편. 물론 생각만 그리하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 인생은 뜬금없는 도전보다는 그럭저럭 일관적인 선택의 연속이었던 거 같다. 큰 방향이 남들과는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내적인 논리적 일관성은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의 첫 한문 수업> 저자 또한 삶의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분 같다. 그러니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미술 기자로 일하다가 한문 번역가가 되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다채로움이랄까. 사실 이 책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살 때는 한문 공부에 대한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한문 공부에 대한 에세이가 맞다. 내가 기대했던 이야기-한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공부법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히 들어가 있지만, 나는 이 책을 한문공부 이야기보다는 인생의 전환기에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 사람의 경험담으로 읽었다.


새로운 도전에서 가장 중요한 열쇳말은 용기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뭘 몰랐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애초에 한문 공부에 큰 뜻이 있지 않았고, 한문 번역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에 한문 공부가 어떤 건지 잘 몰랐고 그저 외국어 하나 배운다는 생각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제대로 알았다면 그 어려움이나 무시무시함도 알았겠지만 그런 것들을 몰랐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옛날에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던 거 같은데 갈수록 생각과 결정이, 선택과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좋게 말한다면 두려움을 느낄 만큼은 뭔가를 안다는 이야기겠지만, 다시 말하면 몰라도 도전해 볼 수 있는 용기가 사그라들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지금 내가 무언가 삶의 방향을 틀 수 있을까? 방향은 그대로라도 하는 일을 크게 벗어나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뭐 그렇다고 꼭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란 것이 아직 나에게도 남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책의 저자가 많이 부러웠다.


애초에 책을 사면서 기대했던 것들-공부에 대한 이야기, 특히 한문 공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이 또한 흥미로웠다.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공부가 무엇이고 왜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저자는 굉장히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공부에 대한 비유 한 구절.


"콩나물 키울 때 주면 주는 대로 쑥쑥 빠지는 물을 보면 참 허무한데 어느새 콩나물은 자라 있다. 공부가 그런 것 아닌가 싶다. 내가 언제 성장하나 싶지만 멈추지 않고 물을 주다 보면 어느새 어느 만큼 자라 있다. 그것도 생각보다 꽤 많이 성장해 있다."


요즘 들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얼마 전 활동가와 책 읽기 특강을 들었는데 첫 강 강사 정희진 선생님은 공부가 활동 그 자체이며, 사회운동의 목표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인풋이 있어야 했던 이야기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내 경우엔 병역거부운동을 20년 넘게 해오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이제 어디 가서도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나름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했던 이야기 또 한다는 느낌을 최근 들어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활동가로서 한 발짝 더 성장하기 위해, 했던 이야기 주야장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인풋이 필요한 시점이 된 거 같다. 돌이켜보면 우연한 인생의 굴곡과 변화는 늘 의도치 않게 새로운 인풋을 만들어주었다.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있을 때 읽은 책과 그때의 경험들로 몇 년을 보냈고, 갑작스레 출판사에 취직해서 책을 만들고 노조활동을 했던 경험과 그때 읽었던 책들 덕분에 또 몇 년을 보냈다. 이젠 내 안에 새로운 상상의 재료가 떨어졌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공부가 하고 싶다고 느끼는 거 같다.


갑자기, 4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공부라니. 쉽지 않겠지만 나는 정신승리 대마왕. 어렵게 한 공부가 더 많이, 더 오래 남는다고 생각한다. 임자헌 작가보다는 훨씬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한 거지만, 임자헌 작가와는 다르게 아예 새로운 걸 공부하는 게 아니라, 20년 넘게 해오고 있는 활동을 확장시키는 공부를 할 거니까. 언제 성장하나 싶은 지루하고 지겨운 과정 동안 멈추지 않고 물을 주다 보면 어느새 나도 성장해 있을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기. 그래 공부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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