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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림동을 지나며

by 이용석

올 가을 자전거 여행은 내장산에서 시작해서 목포로 가는 영산강 자전거길. 담양에서 광주까지 오는데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했던 코스는 극락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광주천으로 가는 자전거길을 타고 양림동 숙소까지 오는 거였는데, 해가 져 어둑해지는 데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우리는 자전거 도로로 멀리 돌아가는 대신 산동교에서 나와 운암동을 거쳐 가는 단축코스를 택했다. 자전거도로는 없지만 내가 중학교 3년 동안 살았던 동네니까. 풍경이나 지형지물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래도 도로는 익숙하겠거니 생각했다.


삼호가든 아파트를 지날 때는 마음이 찡했다. 우리 식구가 처음 가져온 우리 집. 울 엄마 아빠는 부지런히 일하고 알뜰하게 아껴 쓰고 부지런히 저축했지만 우리 식구가 전세를 벗어나 처음 집을 갖게 된 건 내가 6학년 때 일이다. 지금 광주 터미널이 있는 광천동 옆 화정동에 살다가 우리 식구는 1992년 동림동 삼호가든 아파트로 이사했다. 저 화단 어딘가에는 내가 만든 병아리 무덤이 있을 것이고, 아파트 상가 3층의 만화책방은 없어졌겠지. 나는 그 책방에서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빌려다 봤고, <타이의 대모험>은 절반은 서서 보고 나머지 절반은 빌려서 봤다. 만화책 빌릴 용돈이 부족해서 그랬던 건데 마음씨 좋은 책방 주인은 앉아서 보라고 의자를 마련해 줬다. 그러면 대여료를 못 받는데도. 인심이 후한 만화책방이었다. 1층에는 레코드 가게가 있었는데 “디제이독 신보” 글씨를 써붙여놨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운암동에서 산동교 건너기 바로 전, 우리 아파트는 마치 광주의 끝자락처럼 느껴졌다. 우리 아파트를 경계로 논과 밭이 펼쳐졌고, 비닐하우스가 있던 풍경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그때는 인도도 제대로 없어서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신발에 진흙을 덕지덕지 붙인 채 학교에 가야 했다.


삼립이었는지 샤니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예전에 빵공장이 있던 곳을 지나 노점 좌판이 널려 있는 버스정류장에 접어들었다. 거기서 좀 더 가면 맞은편에 주민문고라는 서점이 있었다. 주민문공서 나는 <퇴마록>을 읽었다. 국내편, 해외편, 혼세편을 다 여기서 읽었다. 종이책은 만화책처럼 빠르게 읽을 순 없으니 여기서는 서서 읽지 않고 앉아서 읽었는데, 다리가 저린지도 모르고 읽다가 일어서면 코에 침을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평소라면 차도로 자전거를 탔겠지만 비도 한 방울씩 내리고 아직 가로등이 켜지지 않아 어둑어둑했기 때문에 우리는 인도로 접어들었다. 인도가 그리 비좁진 않았지만 노점 좌판이 있고 사람들도 많아서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데 바퀴가 휘청했다. 생각보다 턱이 높았고 바닥이 미끄러웠다. 겨우 중심을 잡았는데 뒤따라오던 나동이 내가 휘청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깜짝 놀랐다. 작년 이맘때 대만 자전거 여행에서 쓰러졌던 나동이니. 물론 지금은 많이 회복해서 신체적으로는 나보다 건강하지만 말이다. 다행히 천천히 달리다 넘어진 거여서 다치진 않았다. 나동이 넘어진 자리를 둘러보니 내가 중학교 때 많이 이용했던 버스 정류장이다. 1994년 어느 토요일이었나, 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우연히 뒤편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뉴스에서 김일성이 죽었다는 속보를 들었다. 그때 나는 전쟁이 나는 줄만 알았다. 김일성의 죽음과 전쟁을 왜 연결했는지는 모르지만 전쟁이 날까 봐 무서웠고 광주는 휴전선에서 멀어서 그래도 조금은 안심했던 거 같다.


한국은 참으로 빠르게 변하는 나라인데,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내내 살았던 우리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신기하면서 반가웠다. 물론 우리 집만 빼고 주변 풍경은 모두 바뀌었지만 말이다. 비 때문에 날씨 때문에 원래 가려던 자전거 도로 대신 거리는 가까워도 난이도는 높은 시내 길로 접어들자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바라보고 싶었던 거였다. 내가 3년 반 동안 날마다 다녔던 등하굣길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달라지기도 했고, 그대로이기도 한 풍경과 내 기억을 대조하며 나는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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