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의 맛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사이 Oct 23. 2022

목련차 한 모금

우리 각자가 본디 지닌 와비사비의 마음

쉽게 손 닿는 곳에 빤히 보이는 곳에

그 모습 그대로


『와비사비: 다만 이렇듯』

레너드 코렌 / 안그라픽스





▪️사물은 무無에서 나와 무로 돌아간다.
_p.10 와비사비의 우주 : 형이상학적 근거


언젠가 '와비사비 라이프'라는 말을 듣고 '와비사비'라는 낯선 용어를 찾아본 적이 있다. 일본어로 불완전함의 미학을 의미한다는데 솔직히 그게 무슨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와비사비 : 다만 이렇듯』이라는 책 제목에서 '다만 이렇듯'이라는 표현이 와비사비의 뜻을 품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다도 이야기에서 시작해 와비사비를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다.

『와비사비: 다만 이렇듯』은 저자가 와비사비わびさび라는 용어를 소개한 『와비사비: 그저 여기에』를 보완해 더 깊이 생각하고 연구한 책이다. 저자 레너드 코렌은 전작에서 와비사비를 “불완전하고 비영속적이며 미완성된 것들의 아름다움이다. 소박하고 수수하며 관습에 매이지 않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다.”라고 명시했다.





감정적인 어조에 물든 사비라는 단어와 일본 다도 관습의 새로운 형식을 구현한 와비차侘び茶를 서술하기 위해, 15세기 후반에 와비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_p.16 혼동의 원인


와비사비는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시가집인 『만엽집萬葉集』에 등장하는 오래된 단어이다. "한시漢詩에서 빌려온 개념이 사비寂び는 '고적함'을 의미했다." "와비는 '마음 깊이 겸손하게 용서를 구하다'라는 뜻의 말에서 왔다."

와비차는 일본의 전국시대에 창안되고 발전했다. 일본의 극심한 사회정치적 혼란기, 바깥세상의 근심으로부터 단절된 다실에서는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가치가 정착했다. 와비차의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선禪의 무소유 정신과 청빈, 겸허와 겸양, 그리고 단순함으로의 경향이 강해졌다.





나에게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살아 있고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더 느끼게 해주는, 표면상 사물로부터 발산되는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감각들의 집합을 뜻한다.
_p.47 와비사비의 인식체계에 이르는 길


"고려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중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삶을 위한 최선의 이유처럼 보였다." 충격적인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삶의 목적에 의문을 품게 된 저자는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설명하는 탐구를 시작했다. 먼저 와비사비의 인식 체계와 어원, 와비차의 창안부터 최후를 맞기 전까지를 톺아보며 와비사비의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명확히 밝힌다. 시대를 거치며 와비사비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일본 다도를 중심으로 살핀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와 일본 문화를 보는 통견을 절충해 와비사비의 온전한 의미를 간결한 단어와 문장으로 정리했다. 미적 타자, 일상적인 것의 변용, 무의 가장자리에 있는 아름다움, 고매한 청빈, 불완전성. 이런 미적 구성 요소를 토대로 와비사비 본유의 특성에 대한 감을 일깨워주는 "와비사비스러운 특성이 반영된 책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창작의 과정을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사물은 (예술가나 제작자의) 기술적이거나 개념적인 개입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다."
이 관점엔 자아가 없다.
_p.71 와비사비한 것들 만들기의 역설


이 책은 저자가 표현하려 했던 와비사와비사비스러운 특성이 잘 반영되었다. 한지와 섞인 듯한 촉감의 종이에 장식 없이 간솔한 서체, 작고 가벼운 물성까지. 기묘한 느낌을 주는 제목과 차분한 색깔, 다양한 모습으로 분해되는 흑백의 나뭇잎 이미지. 그저 그곳에 불완전한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무심함을 드러낸다.

저자는 "과연 누가, 무엇이 와비사비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와비사비는 그저 '발생한다'는 단순한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답한다. 옮긴이의 글에 나온 염화미소염拈華微笑의 일화처럼, 말로 전할 수 없는 미묘한 마음을 언어로 빚어냈다. 나뭇잎의 잎맥처럼 뻗어 나간 다완의 금 간 자국에서 다완을 빚은 사람의 손길과 정신으로, 거미줄처럼 무한한 스펙트럼으로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우리 각자가 본디 지닌 와비사비의 마음'을 발견하고 살필 수 있게 보여준다. 저마다의 마음을 바라보게 한다.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을 살필 수 있는 책이다. 미묘한 와비사비의 마음에 깊이 다가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이 실타래 풀리듯 이어져 감각을 섬세하게 깨우는 경험이었다. 가볍고 얇은 책이지만 내용이 깊고 넓어서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목련차를 한 모금 머금은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은 계란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