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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란 Oct 09. 2022

빵 냄새를 맡으며 출국을 결심하다.

INFJ의 자기계발 기록ㅣ해외살이 편

    코로나 이후 회사 사람들과 종종 대표님이 하셨던 말씀을 회상하곤 했다. “연휴 끝나면 본격적으로 무척 바빠질 테니, 다들 푹 쉬다 오세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푹 쉬게 될 줄이야.


    2019년 끝과 2020년의 시작은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길 새도 없이 바쁜 겨울이었다. 오전에는 학과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주로 빈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업무를 했다. 통학 시간을 고려했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저녁과 주말에는 과제를 하거나 이벤트 현장으로 출근했다. 과대표, 인턴 등 시도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부담감이 있긴 했지만 늘 그렇듯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이 부담감을 이겼다. 넷플릭스와 엄마가 차려주신 저녁이면 금세 풀릴 정도의 피곤이었다. 인턴에서 정직원으로,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많은 변화의 시기였다. 그리고 대학 생활 그리고 인턴 생활 모두 마쳐갈 때 즈음 회사에서 정식 입사 제안을 받았다. 입사를 결정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3년 가까이 근무할 거라는 건 예상치 못했다.


    많은 업계들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이벤트 업계에서 연말연시는 대목 중 대목이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이벤트를 위해 모든 직원들이 똘똘 뭉쳐 움직였다. 역대 가장 큰 규모의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날에서야 비로소 우리 팀은 숨을 좀 고를 수 있었다. 고생한 지난 한 달을 회상하며, 맛있는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표님이 팀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우리 정말 바빠질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설 연휴 동안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푹 쉬다가 오세요.” 나는 이 말이 앞으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많아질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래서 겨울 추위에 롱 패딩을 입듯 피곤에 절대 지지 않으려 연휴 동안 배에 기름칠도 잔뜩 하고, 정말 푸욱 쉬었더랬다.



    나와 동생은 생일이 고작 이틀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둘의 생일 주간에 맞춰 가족끼리 외식을 하는 우리 집만의 루틴이 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생일맞이 저녁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동생이 집을 나서면서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누나, 중국에 코로나라는 게 유행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확진자가 나왔대. 우리도 곧 매일매일 마스크 끼고 다녀야 할지도 몰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에이, 심해야 독감 정도겠지. 요즘 약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독감 주사도 맞았으니까 그냥 옷 더 따시게 입고 맛있는 거 먹으면 돼.” 그러고는 그 말을 금세 잊어버리고, 식당으로 발걸음을 서두르던 나였다. 그리고 한 일주일이 지났을까, 우리의 일상에 코로나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우기 시작했다. 졸업식이 취소되고, 예정되어 있던 미팅들도 하나둘씩 취소됐다. 사람-사람 간의 만남 자체가 통제되다 보니, 이벤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코로나 사태 3년 차인 지금에야 메타버스, NFT 등 온/오프라인이 결합된 다양한 옵션들이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훗날 마스크 대란으로 인해 이른 아침부터 마스크 단 2장을 구매하려고 줄을 서 있을 때마다 나는 ‘그 말을 좀 더 귀 기울여 들을 걸..’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 사태가 이렇게까지 길어질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연스레 2020년에 캐나다로 출국하려던 내 계획도 와장창 무너졌다. 퇴근길이면 “에이, 그래도 이번 달안엔 괜찮아지겠죠.” 했던 말은 ‘다음 달’이 되고, ‘올해 안’이 되다가 어느새 길을 잃었다.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감염에 대한 공포도 커졌고 해외 뉴스란에는 아시안 헤이트에 대한 뉴스에 대한 헤드라인이 잦아졌다. 설상가상 회사에서 비즈니스 모델을 변경하면서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직책과 업무를 맡게 되면서 예측 불가한 매일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그저 망망대해에 두둥실 떠있는 부표처럼 차츰차츰 생기를 잃어갔다. 그 시점에 한동안 잠잠하던 우울도 건수를 하나 잡았다는 듯 스멀스멀 자기 영역을 넓혀갔다. 원래도 집순이이었던 나는 더 집순이가 되었고, 나의 바다 저 아래로 깊이 더 깊이 헤엄쳤다. 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아주 어두운 심해로.



    자발적 집순이에서 강제적 집순이가 되면서 새로 생긴 취미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베이킹이었다. 평소처럼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내 최애 취미인 ‘콘텐츠 소비하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프로파일러 이수정 교수님의 인터뷰를 보게 됐다. 인터뷰에서 교수님이 “소년원에 복역 중인 아이들에게 제과제빵을 가르치면 재범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에 대한 이유 중 몇 가지가 굉장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우선 빵 굽는 과정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고, 계량과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노력으로 맛있는 빵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면서 절제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다는 것이었다. 노력이 결과로 직결된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것들에 제한이 생기면서 얻은 좌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거북이 집처럼 침대에 등에 붙이는 생활을 이어가던 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매일 겪는 회의감과 자책에도 신물이 나던 터였다.  비록 손재주는 없었지만 요리는 늘 좋아했던 나였기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지승호의 경청]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양진호, 안인득, 조두순, 고유정의 근원. 2019년 8월 14일. 뉴시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90810_0000737414


    첫 시도는 처참히 실패했다. 정말 처참히. 절인 복숭아를 얹어 구워내는 쿠키였는데, 반죽은 거의 팬케이크가 되었고, 복숭아는 수분만 바싹 날아가 종이짝처럼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게 먹어준 가족들에게 이 글을 빌어 감사를 표한다. 머쓱 ^^;) 근데 그 실패 속에서 느낀 게 있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명언을 이럴 때 쓰게 될 줄이야. 마카롱이 비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직접 구워봄으로써 다시금 확인했다.



생각을 멈추고 싶어도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느라 늘 생각이라는 방 안에 갇혀 살았는데, 계량과 반죽 상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퐁실퐁실 빵이 구워지는 걸 보고 있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쿠키 밖에 없었다. 비로소 생각과 나를 분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주말이면 식빵, 마들렌, 스콘 등 레시피를 하나씩 골라 빵을 구워냈다. 하나하나 완성해 갈 때마다, 나 자신이 조금씩 빛을 향해 다시 헤엄쳐 올라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푸른색만 짙던 바다에 노란빛이 새어 드니, 그간 뒤로 해둔 것들이 차츰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저 이탓저탓만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둥실 떠있기만 했던 내가 보였다. 그 순간 결심했다.


출국 날짜를 정하고, 코로나가 없어지든, 여전하든 그냥 떠나는 거야.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걱정은 가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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