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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Sep 13. 2024

지켜진 아이

그래서 더욱 소중한 아이

춤추고 있었지. 아이와 둘이 있을 때, 아이를 돌보며 아이의 시선을 끌려고 하면서. 날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건 사실 아니지만, 칭얼대고 있으니까 칭얼대길 멈추길 바라며. 주위의 움직이는 것들에 관심을 쏟게 하려고. 그렇게 나도 주위의 것이 되어 움직이고 아이 앞에서는 그러니까 아무 말이나 할 수도 있었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중략)
아이는 웃는다. 내가 먼저 친 손뼉을 아이는 따라 치고, 그러다가도 칭얼대며 운다. 순간 아이는 미래를 보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모르겠으니까, 아이가 왜 웃는지 왜 우는지. 그리고 나는 아이의 훗날을 상상하지. 아이가 다 컸을 때 내게 하는 말을. 삼촌, 그건 다 연극이었어? 어렸을 때 앞에서 이상한 노래 부르고 이상한 춤 췄잖아. 나는 놀라워하면서, 그걸 다 기억하고 있구나, 신기하다, 신기해. 그렇게 내가 미래의 아이를 안아주었으면.

 안태운, <아이와> 『기억 몸짓』



이번 달에도 유리를 만나고 왔다.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시도하고 있다. 그 과정이 퍽 즐겁다. 선택지를 넓혀가는 과정 속에 나의 세계도 동시에 확장되어 간다. 다만 이번 달은 평소와 달리 기관에 조금 더 일찍 방문했다. 지난달 유리와의 만남에서 약간의 균열이 생겼던 터라, 유리가 지내는 기숙사 선생님께 간담회를 요청드렸기 때문이다. 약 1시간 동안 유리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아갈 수 있었다. 아이를 통해서만 들었던 이야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오류가 있었고, 가장 놀랐던 건 유리에게 ADHD가 있어 치료를 받는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언어구사력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단순히 발음의 문제라고만 생각했었다), 어릴 때 청각에 문제가 있어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던 기간이 길어 말이 더디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근데 이 사실들을 알고 나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유리와 함께 할 때마다 아이라서 그런가? 싶은 산만한 행동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걸 잠시도 견디지 못해 앞 친구를 새치기하려 하거나, 하나의 놀이에 너무 빨리 싫증을 내고 자리를 뜨거나, 질서 없이 이말 저말 떠오르는 대로 중언부언하는 걸 보면서 의아할 때가 많았으니까. 이제야 그간의 모습들에 대한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말에 집중하고자 만날 때마다 차근차근 메모를 이어갔는데, 이 정보에도 꽤나 많은 오류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유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한 층 더 따스해졌음을 느꼈다. 적어도 유리가 했던 행동들이 나를 싫어해서 했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니까. 기관에 복귀할 때마다 선생님들은 유리가 다음 만남을 기다린다는 말씀들을 자주 해주곤 하셨는데, 글쎄... 내가 막상 마주한 유리는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이 놀이를 좋아한다고 하길래 실컷 준비해서 조금 해보려 하면 금방 시시해하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빼앗겨버리거나 나의 어떠한 질문에도 "싫어요", "아니요"로만 일관하는 태도에 속상할 때도 많았다. 유리에게 학교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재미없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오는 건 (아이니까) 그럴 수 있었지만, "제가 다 잘해요"라는 답이 돌아올 때마다 속으로는 '정말?'이라는 생각이 올라오기도 했었다.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봐온 유리는 집중력이 부족하고 산만하다 느낄 때가 정말 많았으니까. 근데 그 모든 증상이 ADHD 때문이었다니.


유튜브 채널 중에 <뇌부자들>이라는 채널이 있다. '정신과 의사들의 진짜 정신과 이야기. 정신과의 모든 정보, 사람들의 심리, 쉽게 알아가세요!'라는 모토로 3명의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이 운영하고 있는데,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다양한 증상들을 소개하고 알려주는 채널이다. 나에게 심리학은 알면 알수록 깊이 있게 꾸준히 공부하고 싶은 분야 중 하나다. 하지만 심리학과를 전공한 건 아니라서 그쪽 분야의 문외한인 내가 정신건강, 심리에 대해 접근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사실 책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채널이 바로 이 채널이다. 유튜브 개설일은 2019년 1월 25일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내가 언제부터 구독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못해도 3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3명은 대학 동기로, 오래된 친구답게 영상 중간중간 서로를 놀리거나 장난을 치면서 은근히 투닥거릴 때도 많은데, 나는 이제 그 모습들마저도 정이 들어버렸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라는 드라마의 실존 인물들 같기도 하다. 특히 이 채널은 일방적으로 정보 전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으며 정신과 진료를 경험한 내담자들을 초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도 진행하곤 했다. 그중에 ADHD에 대한 영상도 꽤 많았는데(이 채널을 운영하고 계시는 김지용, 허규형 선생님도 ADHD가 있다), 전에는 그저 상식을 쌓는 선에서만 멀찍이 듣곤 했다면 이번에 유리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그 영상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 싶었던 게 유리를 생각하며 들으니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유리가 더 좋아하고 집중할 수 있는 놀이들의 선택지가 훨씬 더 많아지고,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물론 시행착오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간담회 말미에 아이들이 생각보다 영악하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그래도 유리는 다른 또래들에 비해서는 순수하고, 맑은 편이라고. 그럼에도, 아이는 아이니까. 특히나 단체생활을 하는 게 익숙하기 때문에 이곳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고 하셨다. 어른이든 아이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이 사람은) 어디까지 가능한지 그 선을 가늠하는 눈치 말이다. 유리를 만난 지도 이제 9개월이 넘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굉장히 조용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유리는 얌전한 아이가 아니었다. 수다쟁이다. 심지어 지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귀엽고, 그래서 내가 더 건강해져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가끔은 유리에게 묻고 싶기도 하다.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지, 우리가 맺고 있는 이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끝으로 선생님께 베이비 박스에 대한 질문도 드렸다. 유리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은지, 유리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선생님은 다 괜찮다고 하셨다. 기관에서 유리는 '지켜진 아이'라고 불리고 있다고. 베이비 박스를 통해 지켜진 아이, 베이비 박스를 통해 이 기관에 올 수 있었던 아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 한 편에 온기가 차올랐다. 그래, 유리는 지켜진 아이구나, 소중한 아이구나, 사랑받고 있는 아이구나.


다음 달에 만나면 우리의 관계가 지난달보다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나에게 마음을 열어줄 수 있을까. 만날 때마다 한 뼘씩 더 자라 있는 느낌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키도 거뜬히 넘을 것 같은데, 그때가 되면 유리가 날 더 시시해하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만 앞선다. 그럼에도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조금 더 용기를 내볼까 한다. 유리의 행복보다 중요한 건 유리의 자립이라는 걸 잊지 말자고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아이의 행복을 위한답시고 불량식품을 주는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아이가 세상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의 고유함을 온전히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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