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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Sep 25. 2024

'완벽'이란 단어의 함정

누가 가장 싫습니까? 

공용 얼음 틀에 콜라 얼음, 커피 얼음을 얼려놓는 사람.
20여 개의 텀블러 보유, 공용 싱크대에 안 씻은 텀블러를 늘어놓는 자칭 환경 운동가.
정수기 옆에 사용한 종이컵을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 사람.
인기 많은 커피믹스를 잔뜩 집어다 자기 자리에 모아두는 사람.
공용 전자레인지의 코드를 뽑고 무선 헤드셋을 충전하는 사람.
탕비실에서 중얼중얼 혼잣말하는 사람.
공용 냉장고에 케이크 박스를 몇 개씩 꽉꽉 넣어두고 집에 가져가지 않는 사람.
공용 싱크대에서 아침마다 벼락같은 소리를 내면서 가글하는 사람.
이들과 함께 탕비실을 쓴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누가 가장 싫습니까?

<탕비실> 이미예



사람들은 왜 자꾸 소리를 지를까. 길을 걷다가도,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도 길거리에서 종종 마주치곤 하는, 소리 지르며 싸우는 사람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 하야하나? 다짜고짜 일단 소리부터 빽 지르고 보는 그 심보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나는 화가 났고, 화를 분출하고 싶고, 에라 모르겠다 꽥. 뭐 이런 건가? 그 상황에서 그걸 고스란히 당하거나 목격하고 있을 타인에 대한 배려는? 존중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분노조절장애가 분노조절잘해라는 말로 희화화되는 것 또한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에 따르면, 분노조절장애의 올바른 의학적 용어는 '간헐적 폭발성 장애'다. 이는 폭력이 동반될 수도 있는 분노의 폭발을 특징으로 하는 행동 장애로, 종종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에 의해서도 상황에 맞지 않게 분노를 폭발하는 증상을 말한다. 호르몬 분비의 이상, 감정 조절과 관련된 뇌 영역의 기능 이상, 어린 시절의 학대 등 다양한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현되곤 한다.


혼자 살기 시작했던 건 30살 봄부터였다.

원가족에게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유롭게 뛰놀던 시기는 진작 지났다.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혼자 짊어지며 산다는 건 주변에 산재한 다양한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걸 차근차근 온몸으로 체득했다. 그중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다름 아닌 타인들의 소음이었다. 6년 차가 된 지금도 이 불안감은 여전하다. 평소 청력이 좋은 편인데, 혼자 살고부터는 원래도 좋았던 청력이 더 밝아졌다. 층간소음으로 꽤 오랜 기간 고통받으면서 귀가 트인 것이다. 흔히 이걸 층간소음 귀트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한 번 트이고 나면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함정이다. 그때 이후로 부쩍 더 원치 않는 소음에 고통받는다. 외국어를 배울 때, 귀트임은 좋은 말로 쓰인다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반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쿵쿵, 쾅쾅, 드르륵, 지이익 같은 다양한 일상(?) 소음에는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긴 건지(포기한 건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진다(이건 어디까지나 넘어가는 게 아니고, 강제로 넘어가지는 것이다). 세상에 조용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 특히 타인에게 보여지지 않는, 밀폐된 자신만의 공간이라면 더하겠지.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고, 익명의 세계가 더 저열하고 날이 선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걸 다 차치하고서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소음이 하나 있다. 바로 누군가의 비명소리다. 이건 단순 소음으로만 볼 수도 없고, 이유도 모르겠고, 이유를 알아도 무섭고. 어떤 상황을 대입해 봐도 도무지 긍정회로가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살면서 소리 한 번 안 질러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하다못해 벌레를 보고 소리를 지를 수도 있으니까), 그 소리가 지속적으로 울려 퍼질 때면 정말이지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찬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듣는 비명은 그 공포감이 배가 된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낯선 동네에 집을 보러 갔다가 건물 후면에서 난데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한 여성을 목격하기도 했다. 훤한 대낮이었는데, 대체 어떤 사연이길래 저토록  날카롭고 처절한 소리를 질러대는 것인지. 처음 방문한 동네였는데, 그분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일단 후순위로 미뤄뒀다. 경관도 좋고, 근처에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 좋다는 평이 많아 일부러 찾아온 곳이었는데, 그분 덕분에 꽤나 강렬하게 '불호'로 각인돼버렸다. 물론 그분 한 분 때문에 동네 전체를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막상 마주한 그 동네는 로드뷰로 살펴보며 상상하고 그려왔던 모습과도 확연히 달랐다. 이래서 발품을 들이는 게 중요하구나 싶기도 했다.


최근에 읽은 리얼리티 소설 《탕비실》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 책은 여러 직장에서 ‘탕비실 빌런’으로 꼽힌 사람들을 한데 모은 7일간의 리얼리티 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데,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찝찝함과 기묘한 불쾌감이 공존한다. "누가 가장 싫습니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작가의 전 작이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불편한 감정을 한껏 자아낸다. 우리는 타인이 보지 않는 공간에서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을까. 도덕과 윤리, 청결함이 사라진 그야말로 동물적인 감각만 낭자한 스산함이 느껴진다. 남이 보지 않아도 신호등의 신호를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이 보든 보지 않든 차가 오지 않으면(심지어 차가 오는데도!) 마구잡이로 손을 휘휘 저으며 신호를 건너는 사람들도 있다. 대중교통에서도 적당한 데시벨을 유지하려 노력하거나 대화 자체를 중단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신의 사생활이 낱낱이 노출될 정도로 우렁차게 떠들어대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사는 곳도 마찬가지다. 1인 가구가 많은 건물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늦은 밤이나 새벽이면 유독 심하다. 내밀한 공간에서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는 이들이 많다. 외로워서 그러는 것일까, 오후에 덜 풀린 화를 이렇게라도 표출하고 싶은 것일까. 가끔은 싸우는 소리도 들리고, 욕설과 고성이 같이 오가기도 한다. 비명을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다. 물건을 마구잡이로 던지는 소리가 날 때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도대체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제도 오랜만에(?) 누군가의 비명을 들었다. 옆집인지, 윗집인지, 옆옆집인지 출처는 알 수 없다. 층간소음 유경험자로서 한마디 덧대보자면,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라고 해서 꼭 근처라는 보장이 없더라. 저 멀리서 바닥과 벽을 타고 타고 넘어오는 경우도 허다하니 말이다(이건 관리실에 연락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어제 비명을 지른 사람은 여성이었고, 누군가와 싸우는 소리인 줄 알고 신고를 해야 하나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듣다 보니 무언가 자신의 비통함을 표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전부터 서서히 끌어내는 비명인데, 이건 마치 동물이 포효하는 듯한 느낌마저 풍긴다. 2차로 물건을 던지는 소리도 났는데, 방바닥에 무언가를 던지며 악을 쓰고 있는 듯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자 추측일 뿐이다. 전에는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겁부더 잔뜩 집어먹고 덜덜 떨기 바빴지만 이제는 다르다.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노력(은) 한다.


소설 《탕비실》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생각이 복잡했는데, 어제의 사건 덕분에 한층 더 이 생각에 몰입하게 됐다. 사적인 공간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다듬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마저 올라왔다. 앞뒤가 다르고, 본능대로 행동하며, 일관성이 없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나였지만, 보여지지 않는 나의 이면과 속마음은 과연 어떨까. 나는 과연 완벽한 사람일까?


뜬금없지만 나는 관계에서도 비슷한 속성을 바란다. 완전무결한 상태의 강박이 있다. 원가족 안에서 지난한 관계를 겪어왔던 터라 이 감각이 유독 더 강렬한 것인지, 미세한 균열이 시작되는 게 늘 두려웠다. 그 작은 균열이 만들어낼 파장이 무서웠다. 관계는 마치 유리와도 같아서 견고할 때는 끈끈해 보이지만 자칫 방심하는 순간 금이 간다. 금이 간 유리는 되돌릴 수 없다. 새롭게 다시 만들거나 그 금을 따라 조금씩 벌어지다 산산이 부서지길 기다리는 꼴이다. 그럴 때마다 올해 초에 읽었던 민바람 작가의 《낱말의 장면들》 속 문장들을 떠올린다. 그에게 관계란 훼손된 흔적을 지워야만 건강하게 지속되는 게 아니라, 시간 위에 함께 남기는 흔적 그 자체였다. 가시밭길 위에서 같은 경로만 맴돌더라도 그 시간이 쌓여 더 큰 연민과 사랑이 되기도 했다고.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앞으로 더 나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진심으로 매번 새로워지기를 기대한다고. 관계는 지키는 게 아니라 누리는 것이라던 그의 문장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유리와의 관계에서 유독 휘청거렸던 나였기에 이 문장을 더 자주 부여잡는다.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온갖 상념들을 주르륵 쓰다 보니 도대체 결론이 뭔가 싶다. 근데 꼭 결론을 지어야 할까. 타인의 소음이든 관계의 불안함이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흘러가는 하루의 일부일 뿐이다. 과정을 온전히 자각하고 해결 방안을 찾을 뿐, 완벽할 수 있다는 기대 자체가 모순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럼에도 다시 또 넘어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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