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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Nov 27. 2024

책이 사람의 등대라면서요

지혜의 집 도서관에 온 지 올해로 딱 10년이 되었고 내 나이의 앞자리 숫자도 어느새 바뀌었다. 내가 막 사서의 일을 시작할 무렵 이곳을 자주 드나들던 초등학생 조카는 얼마 전 수능을 치렀다. 며칠 뒤면 성인이 될 조카를 바라보며 조금은 먼 미래를 생각해본다. 이 아이가 서른에 접어들면 또 내 나이의 앞자리 숫자도 바뀌어 있겠지. 그때도 여전히 나는 지혜의 집 사서로 살아가고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작은도서관이 문닫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이 공간에서 '사서의 일'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사서의 일> 양지윤



내가 처음으로 도서관(이라는 곳을) 갔던 게 언제였더라. 이 책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7살쯤이던가, 창원에 이사간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영문도 모른 채 엄마 손에 이끌려 향하곤 했는데, 일단 건물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동네 안에 정차하는 의문의 버스. 바로 이동도서관이었다. 책을 가득 실은 버스가 아파트 단지에 조용히 멈춰 서면,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버스 안으로 들어가 나에게 책을 골라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의 바람과 달리 어렸을 때의 나는 책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밖에 나가서 방방방 뛰어놀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 하니 그저 답답할 뿐.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버스 안에서 이 책 저 책 심드렁하게 뒤적거리다 마지못해 한 권을 고르는 식, 이게 나와 도서관의 첫 기억이다. 역사의 한 흐름처럼, 이제는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이동도서관을 다시 찾아보게 됐다. '찾아가는 도서관'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여러 도서관에서 다시금 이런 형태의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잊고 있던 도서관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 건 이번에 읽은 <사서의 일>이라는 책 덕분이다.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는 아직 모호하지만, ‘책과 관련된 일을 하겠다’를 아이-원트-송으로 흥얼거리는 내게 이 책의 제목은 꽤 의미심장했다. 매듭은 천천히 지으려 한다. 1인 출판사나 동네서점도 생각했었고, 글을 쓰는 직업(꼭 작가가 아니더라도)도 여러 가지를 떠올려봤다. 대학원(문예창작과나 국어국문학과)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고, 읽고 쓰는 것과 관련된 편집자, 사서 등 온갖 직업군을 찾아보기도 했다(물론 이 모든 직업군은 기초가 없기 때문에 바닥부터 배워야 할 테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만난 책이다. '책과이음' 출판사에서 '느린사람' 활동을 하면서 신청했던 두 권의 책 중 마지막 한 권이기도 하다. 이 책은 동두천시 사동초등학교의 도서관이 아닌, 부속으로 있는 '지혜의 집'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양지윤 사서의 에세이다.  2021년에 출간된 책인데, 작가의 소개글에는 '어느덧 10년 차 계약직 사서의 소심하고도 치열한 도서관 운영기'라는 문장이 담겨있다. 이 책이 출간된 지도 3년이 지났으니, 그녀는 어느새 지혜의 집 사서로 13년 차가 된 셈이다.


지금껏 내가 주변에서 들어온 '사서'에 대한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다.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 엉덩이가 무거운 편. 다독가. 그리고 종종 한가한 사람. 더러 맞는 점도 있고 완전히 틀린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모험'과는 거리가 먼 직업이라는 인상이 강한 듯하다. 사서가 되기 전, 내 생각 역시 주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도서관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이곳만큼 내 안에 꾹꾹 눌러왔던 모험심을 자극하는 곳도 없었다. 그야말로 온갖 모험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나 할까.



오래전에 참여했던 독서모임에서 사서로 일하시는 분을 만났던 적이 있다. 당시 그 모임은 고정멤버로만 운영되던 곳이었는데, 그때 처음 알았다. 사서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단하고, 다재다능(심지어 힘도 세야 하겠더라는) 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양지윤 사서가 책에 남겨놓은 문장처럼, 나 또한 사서라는 직업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 조용하고, 우아하고, 차분한 사람.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갈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해박한 지식으로 책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자신만의 책 취향이 꼿꼿할 것 같은 사람. 일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하는 일이 책을 만지는 일이라 생각하니, 뭔가 다 정적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인의 목소리를 통해 듣게 된 도서관의 모습은 꽤나 생경했다. 그곳 또한 누군가의 철저한 일터였고, 고상하게 앉아 책을 읽을 시간은커녕 각종 행사에 서류 작업에 정리할 것도 많고, 주말 출근까지 더해져 강행군이 따로 없었다. 모든 면에서 만능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심지어 악성 민원도 잦아서 온갖 고충을 다 겪고 있었는데, 평일 퇴근 후 독서모임이었던지라, 지인의 지친 모습이 늘 안쓰러워 보였다.


양지윤 사서가 일하는 지혜의 집 또한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우선 도서관 자체가 작아 그곳을 찾는 발길이 거의 없었고, 일도 찾아서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학교 도서관이 아닌, 학교와 떨어진 부속 도서관이라 더 그랬으려나. 심지어 학교 선생님들조차 지혜의 집 도서관에 큰 기대가 없어 보였다. 가만히 그 자리를 지켜주기만을 바랐다. 양지윤 사서는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딱히 없다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혼자 감당해나간다. 첫날 도서관에 도착해서는 오랫동안 닫혀있던 그곳을 활짝 열고 청소하는 데만 하루 반나절의 시간을 쏟기도 한다.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치는 불량 학생들 때문에 거친 성정을 부러 나타내기도 하고,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온갖 수다를 떨며 도서관을 만남의 광장처럼 여기는 학부모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교대해 줄 직원도 없이 홀로 그곳을 관리하느라 점심 먹을 시간조차 빠듯하지만, 알뜰하게 도시락을 싸와 자신만의 안온함을 찾아가는 단단한 모습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2년의 계약기간을 마치고,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어 더 오랫동안 그 공간을 가꿔가게 된다. 적은 예산을 알뜰하게 모아 서가에 들일 책을 정성스레 고르고, 여러 교양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해간다. 도서관 사서이자 일본어 번역가이기도 한 그녀는 지혜의 집에서 직접 일본어를 가르치며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10년 넘게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숱한 어려움을 만났지만 매번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해결책을 찾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힘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녀에게 지혜의 집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기르는 일에는 서툰 나지만, 이 작은 공간만큼은 사라지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내고 싶다."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그녀만의 올곧은 힘이 실려있다. 꼭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 공간에서 '사서의 일'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던 에필로그를 읽으며 가만히 책을 덮었다.


이 책을 읽고 문득 지혜의 집이 궁금해졌다. 양지윤 사서의 말처럼, 여전히 그 공간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운영되고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지혜의 집이 강제로 폐관될 위기에 놓여있다는 화가 나는 소식이었다.


https://naver.me/Fy2OskUs


이어지는 건 양지윤 사서의 글이다.


"사동초 지혜의 집 작은도서관 폐관 이슈를 다룬 신문기사가 난 다음날, 폐관에 반대하는 시민 분들이 작은도서관에 모였습니다. 10년 넘게 활동하는 작은도서관 동아리 회원들, 몇 년 전부터 도서관을 애용하고 있다는 분들이 함께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시에서 벌이는 비민주적인 폐관 방식에 맞서, 시민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폐관 철회를 요구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지혜의 집은 작은도서관 폐관 반대 서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 또한 서명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사실이었다(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게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기사에도 나와있지만, 2022년에 마포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어 시민들의 공분을 샀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만들어진 곳인데, 어떻게 지켜온 곳인데. 여전히 그 공간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데. 부디 작고 소중한 이곳이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사라지게 된다 해도 한번은 꼭 방문하려 한다. 하나씩 사라져가는 작은 동네 서점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종종 무력감을 느낀다. 도서관도 마찬가지일까. 누군가에게는 우주일 수 있는 그 공간이 이렇게 사라져가는 걸 마냥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다시 또 무언가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나 또한 자주 방문하는 작은도서관이 하나 있다. 회사 근처라 점심시간에 종종 다녀오곤 하는데, 규모가 워낙 작아 서가에 책이 많지는 않다. 그래서 상호대차 서비스를 더 많이 이용하고, 가끔은 희망도서를 신청하기도 한다. 덕분에 꽤 많은 책을 이곳에서 만났다.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점심시간에 가면 직장인들의 쉼터가 되기도 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모여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채워가는 게 아닐까 싶다. 회사에서 나만 이 도서관을 애용하는 줄 알았는데, 나처럼 몰래몰래 이곳을 다녀가던 동료가 있었다. 하루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 마주치는 바람에 서로 어찌나 놀랐던지. 다행히 그는 작년부터 나와 책으로 소통을 이어가던 몇 안 되는 동료 중 한 명이었다. 비밀아지트가 들킨 기분이었는데, 사서님들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엮어가는 동료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곳이 비단 나의 아지트만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작은도서관이 만들어준 또 하나의 연결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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