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민해 Dec 05. 2024

실패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나지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과거 누군가에게 선물 받아 읽었던 <여행의 이유>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문장이다. 이 말인즉슨, 누군가의 선물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평소 김영하 작가의 소설집을 여러 권 읽었음에도 이 책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건 다름 아닌 '여행'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여행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다녀온 여행지에 대해 '자, 이곳이 어떤 곳이냐면 말이지'로 시작되는 특유의 텐션이 퍽 부담스럽기도 하고, 여행 자체에 무감한 내 성향도 한몫할 테다. 그렇다고 여행이 싫다는 건 아니다. 나도 여행은 좋아한다. 다만 여행부심이 싫다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가 매 순간 여행지라는 감각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세계 온갖 좋다는 곳을 여행하고 돌아와 '나 여기도 가봤다?'라고 자랑하는 듯한 이들의 여행책에는 도무지 손이 가질 않았다. 심지어 소설 속 여행 장소에 대한 묘사도 아니고, 에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마치 그곳을 가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특유의 호들갑스러움이 부담스럽다. 여담이지만 나의 서점 여행기 또한 마찬가지다. 이게 무슨 자랑거리가 아니라, 그냥 내가 가봤고, 좋았고, '혹시 제 글을 읽고 가보고 싶은 서점이 있으시다면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지요' 정도의 느낌이랄까? 쓰면서도 약간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더 정확히는 유명 관광지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너네 여기 안 가면 큰일 나)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단 여행지에 대한 장황한 소개가 없다. 책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답조차 주지 않는다(근데 제목이 왜 '여행의 이유'인지요). 심지어 여행 에세이라면 으레 등장할 법한 사진도 한 장 없다. 여행을 갔다가 추방당한 이야기가 이 책의 도입부다. 역시 만능 이야기꾼 김영하 소설가다웠다. 이 책 덕분에 그에게 품었던 일종의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했는데, 좋은 경험이었다. 덕분에 그가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이 책이 다시금 떠올랐던 건 얼마 전에 다녀온 북콘서트 덕분이다. 모집 인원이 무려 450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신청 순서에 따라 자리가 정해지는 것 같아 빠르게 신청 버튼을 누르고, 무대와 멀지 않은 곳에서 김영하 작가를 마주할 수 있었다. "김영하 작가가 들려주는 '여행과 인생, 소설 이야기'"라는 제목을 가진 이번 콘서트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여행(인생)은 잘 실패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패해도 괜찮은 환경을 계속해서 경험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이들의 여행 에세이에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동안 내가 경험한 여러 여행 에세이들은 대체로 누군가의 성공담이 많았다. '이렇게 멋진 여행을 다녀왔답니다, 여러분'이라고 속삭이는 듯한, 진부한 감상만 남는 목소리들 말이다. 하지만 <여행의 이유>는 달랐다. 읽는 내내 작가의 실패담에 키득키득 웃을 수 있었고(죄송합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의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실패(와 거절)로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이어지는 작가의 목소리. 그래,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무색무취한 이야기들 말고, 자신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경험을 담은 이야기를 말이다.

최근에 읽었던 김애란 작가의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 다소 아쉽다 느껴졌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 무려 13년 만에 출간된 장편이었다. 물론 내용은 좋았다.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문장도 많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고통의 서사를 다룬 세 명의 아이들이 등장하지만, 예쁘고 아름답게 포장된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기분마저 들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탓일까? 잘 모르겠다. 그냥 뭔가가 밋밋했다. 싫다는 게 아니다. 좋았다. 좋았는데, 그냥 딱 좋기만 했다(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정말). 그래서 지난달 독서모임은 이 책으로 정했다. 궁금했다. 다들 이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모두 비슷한 감상을 남기고 책을 덮었다고 말했다. 김영하 작가의 북콘서트에서 어렴풋이 짐작했던 이유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 그래, 너무 잘 써서(고통이 없어서) 남는 게 없었던 거다. 고급스럽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를 진하게 경함한 느낌이랄까. 실패가 없었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혜화동 곳곳을 걸어 다니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의 인생은 앞으로 몇 번의 실패를 더 마주하게 될까. 아마 셀 수 없이 많을 테지. 어떤 실패는 뼈아픈 고통이 될지도 모르고, 또 어떤 실패는 툭툭 털고 금방 일어나 씩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의 나는 어떤 일도 실패하지 않기를, 고통이 없기를 바랐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실패해도 괜찮은 환경을 계속해서 경험하는 사람이고 싶다. 거절도 마찬가지다. 그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조금 더 건강하고 단단한 내가 되어있지 않을까. 유명한 맛집을 찾아갔을 때 맛이 좋으면 성공하는 것이고, 맛이 없어 실패하면 글로 남기면 된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의 이 말을 참 좋아했는데 말이다. 인생이 즐거우면 그 자체로 즐기고, 인생이 힘들면 그 자체로 하나의 글감이 되는 것. 그렇게 쓰고, 지우고, 다시 또 쓰면서 나를 천천히 알아가는 것. 이 모든 게 쌓여 인생이라는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게 아닐까.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서 소리는 말한다. 이야기는 시작이 있어 좋다고. 뒤이어 지우는 말한다. 이야기는 끝이 있어 좋다고. 이 둘의 대화가 유독 기억에 남았다. 참고로 나는 소리와 같은 마음이다. 뜬금없지만 올해 초, 지인이 운영하는 독서모임에서 갔다가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던 적이 있다(그날의 지정도서가 <보바리 부인>이었다). 그때 나의 대답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더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그리고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타인의 삶을 존중할 줄 안다. 좋은 이야기를 읽으면, 작가가 주인공을 어떻게 다루는지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하던 김영하 작가의 목소리가 가만히 겹쳐졌다.

북콘서트의 3부 순서였던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하나 있었다. 2019년 10월 25일, 김영하 작가가 아내와 함께 '복복서가'라는 출판사를 만들었다는 것. 심지어 복복서가는 그동안 김영하 작가의 대표작을 출간해온 문학동네와 합자해 세운 출판사이기도 하다. 책의 기획, 편집은 작가의 취향에 맞춰 제작하고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마케팅, 디자인, 유통 등은 문학동네에서 협업하는 구조라 사실상 그가 기획하는 독립출판사인 셈이다. 그리고 반가웠던 건 몇 년 전 내가 읽었던 <완벽한 아이>라는 작품도 한국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프랑스 작가의 책(모드 쥘리앵의 자전 에세이)이었는데, 복복서가에서 직접 발견하고 국내에 출간했다는 사실이었다. <완벽한 아이>를 출간할 당시 그는 이런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해 말 아내와 함께 '복복서가'를 만들면서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깝게 묻혀버린 좋은 책을 발굴하고 펴내자고 다짐했는데, 그 첫 결실인 '완벽한 아이'가 나왔습니다."

실로 감동적인 문장이 아닐 수 없었다. 콘서트 말미에는 조만간 신작이 출간될 예정이라는 말도 전했다. 그의 가장 최근 작품이었던 <작별인사>에 살짝 실망했던 터라 기대 반 걱정 반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설레는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만약 내 질문이 뽑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작가님의 차기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