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실제로 기태의 젊은 시절 꿈은 훌륭한 어른은 못 돼도 산뜻한 중년은 되는 거였다. 청결한 옷을 입고, 타인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젊은 세대를 지지하고, 주변에 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되 '나'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 거라 예상 못한 까닭이었다.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인이 운영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종종 나간다. 이 모임도 햇수로만 벌써 7년이 넘었다. 규모가 꽤 있는 편이라 다양한 직업군이 참여하는데, 자유도서와 지정도서 모임 외에도 다양한 주제의 모임들이 번외 편처럼 열리곤 한다. 그중 내가 주로 참여하는 건 지정도서 모임이다. 자유도서의 경우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에 드는 책이 지정도서로 올라올 때만 간간이 참여하는 거라 작년 가을 이후 처음이었다. 나처럼 띄엄띄엄 참석하는 이가 많아 거의 몇 년 만에 만난 고인물(나 포함) 멤버들도 있었다. 변함없는 서로의 모습에 안도하며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그게 벌써 초여름의 일이다. 그날 지정도서를 연 리더는 준비성이 철저했다. 발제문부터 PPT까지 정성스럽게 준비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시간이 부족해 질문을 충분히 나누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는데, 지난주에 예상치 못한 카톡을 하나 받았다. 카톡을 보낸 이는 앞서 말했던 고인물 멤버 중 한 명이었는데, 그에게 이렇게 개인적인 카톡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카톡에는 장문의 글이 담겨있었다. 지난 모임에서 내가 지나가는 말로 (하지만 힘주어) 추천했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그는 나의 말처럼 그 책이 정말 좋았고, 생각할 지점도 많았는데, 막상 그 책을 읽고나니, 내가 했던 어떤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그의 궁금증을 압축해보자면 대략 이런 맥락('아니, 그 책을 읽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어요?')인데, 정확한 궁금증은 "해연님은 특정 나이가 되면 죽고 싶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였다. 이어지는 그의 문장에 멈칫했다. "저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문장에 웃음이 나기도 했고. "해연님은 정신적으로 건강해 보여서 더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런 질문, 참 많이도 받았다(진부하다 진부해). 죽음에 대한 내 소신을 말하면 으레 따라붙는 질문은 늘 이런 식이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거야?" 아휴, 정말. 머리에 공지라도 써 붙이고 다녀야 하나(아니, 그리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죽음을 선택할 수 없나? 거참).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질문뿐만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으며 메모했던 문장들까지 가득 담아 나를 도발(?)했다. 오래 본 사이라 나름대로는 그에 대해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의외의 면에 흥미가 동했다. 그렇게 이틀 후 길고도 긴 답장을 전했다. 차마 그 글을 다 담을 수 없지만 서론만 살짝 옮겨본다.
근데 옮기고 나니 서론도 길다.
아주 심오하고도 어려운 질문을 주셨군요. 그래서 답이 늦었습니다. '하트'만 찍고 도망가려던 건 아니었으니, 혹시 오해하고 있으셨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어요(현생 일에 치여서 살짝 바쁘기도 했고요). 사실 이 이야기는 만나서 와글와글 나누는 게 더 부드럽게 전달될 텐데("OO님은 정신적으로 건강해 보여서"라는 문장에 살짝 웃음이 났습니다), 카톡으로 질문을 주셨으니,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매끄럽게 잘 풀어서 제 의견을 말씀드려볼까 해요. 아, 수집해 주신 문장도 잘 읽었습니다. 타이핑 필사가 품이 많이 드는 일인데, 그토록 정성스럽게 전해주셔서 감사했어요. OO님 말씀대로 다시 이 책의 내용을 상기할 수 있어 좋았고요. 그럼 저의 답변을 이어가봅니다. 조금 날카로울 수도 있으니 베이지 않게 조심하세요.
제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장강명 작가님의 <표백>입니다. 모임에서도 종종 이 책의 '호'에 대해 나눴던 기억이 있는데요. 이 책이 좋았던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죽음과 자살을 밀도 있게 다룬다는 점이었어요. 사람들은 흔히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지?' 혹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자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조심스러워합니다.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는 "그래서 죽고 싶다는 거야?" 혹은 "그래서 죽겠다는 거야?" 등. 다소 민감한 (하지만 저에게는 진부한) 질문이 이어지기도 하죠.
이번에 그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며 다시 한번 깨달은 게 있는데, 다들 나를 너무 강인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힘이 강하다는 게 아니라(왜소한 편입니다만) 정신력이랄까, 뭐 그런 거.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나만 알고 있는 내 세계는 늘 시끌시끌하다. 촘촘하다 못해 나 자신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질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푹 빠져 온갖 상념을 떠올리는 걸 보면 이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무언가를 계속 쓸 수밖에 없다. 주제는 그때그때 다르고, 당장 받아 적지 않으면 그냥저냥 날아가 버릴 때도 많지만.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해서 뭔가가 흘러넘친다. 글이, 마음이, 생각이. 특히 요 근래 쓰고 있는 글은 브런치에 올리기에는 다소 조심스럽다. 어딘가 고장 나 있으니까. 삶에서 한 번씩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그동안의 삶이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느낀다. 평온함이 기본값이 아닌 세상이라는 걸 자꾸 망각한다. 최근에 읽었던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이라는 책 제목처럼, 망가진 세계에서 내가 취해야 할 지혜로운 자세가 무엇일지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배워간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밤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거의 7년 만이었다. 새로 이사 온 동네는 공원이 많아 밤에도 무섭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그와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그렇게 길고도 긴 답장을 보냈건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에게 또다시 답장이 왔다. 심지어 내가 보낸 장문의 분량에 버금갈 정도의 분량으로 말이다. 다만 다시 답장을 하지는 않았다. 이건 한두 마디로 끝날 글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가 말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그의 주장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왠지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이해라는 것도 사실 내 입장에서는 좀 진부했다. 비슷한 류의 질문을 종종 받아왔던 터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너 OO이면 OO야? 같은 질문. 다만 어떤 말은 굳이 이해시키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이해받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이건 설명의 부재가 아니라 이해의 부재다. 그럼에도 그의 질문과 답장이 좋았다. 생각할 지점이 많았고, 답장을 쓰면서 내 생각을 하나의 줄기로 정리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그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인 것 같았고 그의 끝인사도 좋았다.
답장을 쓰면서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고 싶은 말들은 여전히 많지만 다 쓰기가 너무 어렵네요. 인생 책이라고 해주신 <표백>은 읽어 볼 리스트에 잘 담아두겠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건강해 보인다”는 말에 웃음이 나셨다는데, 왜 웃으셨을지 다음에 뵈면 꼭 얘기해 주세요. 그 부분이 제일 궁금합니다. 저는 별로 의심하지 않거든요. 제가 한 말을.
원래는 이 글을 쓰기 전, 지난달에 있었던 우리 독서모임(매달 한 번씩 공동 리더님과 돌아가며 열고 있는)에 대한 글을 작성했었는데, 클릭 한 번으로 모조리 날려버린 쓰라린 경험을 했다(음 그냥 바보였다). 그날을 기억하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하도 어이가 없어서). 정말 길게 공들여 썼는데, 한순간에 날아가다니. 순간 이게 꿈인가 싶어 그 자리에서 한참을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 알았다. 내가 탭으로 글을 쓸 때 주로 사용하는 앱은 자질구레한 기능이나 광고 없이 오직 쓰기에만 충실한 앱이라 늘 애용했는데, 너무도 단조로운 나머지 실행취소 버튼조차 없었다는걸.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지만(아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놀랍게도 사실이다. 그 앱을 사용한 지도 꽤 오래됐는데, 그동안은 용케도 글을 날리지 않았다는 게 기적일 정도. 공모전에 내는 글이었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브런치라 다행이다 싶었다. 비록 글은 날아갔지만 완성했다는 사실에 개운했고, 발행하려 옮기는 과정에서 날아간 거니까 뭐, 충분히 즐거웠으니 됐다.
덧, 다음 모임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민감한 주제는 살짝 내려놓고, 웃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