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돋은 한 가닥의 마음이라도 상념들이 따라붙으면 질량을 갖게 되면서 더는 무상(無常)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의식 한가운데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제 그것은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사방팔방 가지와 뿌리를 뻗을 차례다. 오래도록 살아남기 위해서는 맥락을 필요로 하며 그것의 최종 목적은 필연성의 획득이다. 이는 마음의 속성일까, 이야기의 속성일까. 그게 그건가.
<숨과 입자> 황여정
긴 꿈을 꾸고 온 기분이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럼 그동안 아무 글도 쓰지 않은 거냐, 라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는 않다. 다른 공간을 조금 빌렸을 뿐이다. 그곳에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는 것도 또 하나의 발걸음이라면 발걸음이겠지. 내가 쓴 소설을 나를 아는 이에게 보인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 브런치만 해도 그렇다. 여러 작가님들이 에세이도 쓰시고, 소설도 쓰신다. 다만 나는 아직 용기가 없어 소설만큼은 이 공간에 남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게 한참 고여가고 있었는데, 즐거운 숙제를 받았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에게 내가 쓴 소설을 보일 수 있었다는 건 꽤나 특별한 경험이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런 경험 자체가 내게는 그저 소중했다. 목적 없는 나의 글이, 어딘가에 살짝 닿은 느낌이랄까. '머지않은 미래에 프로 소설가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는 극찬이 꽤 큰 힘이 된 것도 사실이다. 설령 빈말일지라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유리와의 인연은 벌써 2년을 향해가고 있다. 보육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낯도 가리고, 말수도 없더니 요즘은 만날 때마다 수다가 한가득이다. 11살의 남자아이는 어떤 세상을 꿈꾸며 살아갈까 궁금했는데, 알면 알수록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 기보다는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 변덕쟁이라는 걸 깨닫는 중이다. 다만 또래 아이들에 비해 지능이 낮고, 학업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그동안 아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고 있었는데, 최근에 담당 사회복지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유리가 나에게 했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풍(거짓)일까 곰곰이 되짚어봤다. 아이를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어렵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산만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걸 병리적으로 바라봐야한다는 게 참, 복잡하다. 증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에 조금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까 기대했지만 여전히 어렵다. 어렵다는 말만 연신 되풀이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보고 온 <세계의 주인>이라는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내용은 다소 무거웠지만 내 나름대로는 긍정의 엔딩이라 여겼다. 다만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한다'는 주인공의 메시지에 마음이 아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실은 절대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 극한으로 내몰려야만 비로소 소리치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영화와는 살짝 다른 이야기지만 장애가 있는 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유리가 만약 나의 아이였다면? 이라는 가정을 달아보게 된다). 감히 상상조차 어렵다. 함께 글을 쓰며 알게 된 몇몇 분들이 발달장애를 가진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애써 숨겨왔던 건 아닌데, 말하는 순간 주변에서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거나 말을 조심하는 게 불편해 말을 아꼈다는 그 말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세계의 주인>에 등장하는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 아니었을까.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순백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주변의 시선으로 강제당했던 것일지도.
사실 이 모든 게 결국은 관계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작동하는 원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답을 알고 싶지만(나만 그런가?) 어느 누구도 정답을 알지 못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야만 하는 게 결국은 관계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모 광고의 슬로건을 지독하게 싫어했는데, 그 마음은 여전하다. 말을 해야 안다. 표현해야 안다. 인내(절제)하는 것과 표현의 게으름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쓰지 않는 것과 쌓아두는 것은 다르다.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고, 쓰는 형태는 내가 성장하는 방향처럼 달라진다. 소설이 그렇고, 에세이가 그렇다. 소설이라는 건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더 나아가서 나는 어디까지를 말하고 싶은 걸까. 내 안에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이걸 소설이라고 거짓말처럼 내 보여야 할지, 실은 내가 겪은 일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지, 여전히 모르겠다. 가끔은 나도 헷갈린다. 이게 정말 내가 겪은 일이 맞는 건지,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흔한 건지를 말이다.
쓰다 보니 문득 그런 궁금증이 올라온다. 보통 내가 브런치에 어떤 글을 썼더라, 어떤 마음으로 썼더라. 하지만 쓰면서 알겠다. 그냥 이렇게 쓰면 된다. 찬찬히 이야기를 풀어내면 된다. 오랜만에 내 메일함을 설레게 한 반가운 이의 소식처럼 말이다. 읽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여러 장르의 책을 병행해서 읽고 있는데, 최근에 읽고 있는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라는 책은 여러 각도로 율곡 이이를 재조명하게 된다. 제목에서 예상되는 장르와 달리 역사를 기반으로 한 책이다. 더 정확히는 조선 선조 시대의 정치사. 읽다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상과 현실은 어디까지 조화가 가능할지, 현실 정치란 무엇일지 여전히 어렵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변화는 싫지만 변주는 좋아하는 내게 직업의 다양성을 열어두는 건 변화일까, 변주일까. 여전히 모르겠고, 그래서 더 배우고 싶어졌다. 그게 뭐가 됐든, 어디가 됐든. 그건 그렇고 브런치의 변화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