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물론 돈은 내고
"늙었으니까 세상 사람들 불편하지 않게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가 그대로 죽으라고?"
영화 <사람과 고기>
언행이 고약한 어르신들을 마주할 때마다 불쑥불쑥 비뚤어진 마음들이 올라오곤 했다. 가끔은 속으로 지독한 말들을 품기도 했다.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소름끼치는 불온한 어떤 것들.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거다. 그게 남들 보기에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모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는 것. 무서울 것 없는 세 노인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 설명만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세 명의 주인공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던 할아버지의 숨겨온 직업이 여운처럼 남기도 했다. 그 직업을 통해 알게 된 그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서도.
인간으로 태어나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게 죽음과 노화가 아닐까. 주어진 생명 시계는 다 다를지언정 필연적으로 찾아오고야 마는 것. 셋은 두런두런 지난 삶의 궤적을 짚어가며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돌아보니까'라는 말을 연거푸 뱉어대는 할아버지에게 또 다른 할아버지가 말한다. 뭘 자꾸 돌아보냐고, 그만 돌아보라고. 별 볼일 없는 인생이지 않았냐는 자조 섞인 말에 그딴 게 어딨냐는 핀잔을 듣곤 하지만, 정말 그렇지 않나?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는 게 어디 있고, 별 볼일 있는 인생이라는 건 또 어디 있는데? 그걸 판단하는 건 누구고? 다들 그냥 고만고만하게 적당히들 사는 거지. 삶을 돌아보는 작업은 내가 종종 하는 익숙한 패턴 중 하나다. 반추라고도 하던데, 성찰의 의미라면 조금 더 거창한가. 영화를 보며 요즘 내가 품고 있던 고민들이 한 줌 먼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역시 인간의 욕심이란 끝도 없구나 싶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내 고민이 뭐였더라...
생각 주머니는 제때 비워주지 않으면 머릿속을 비집고 나와 지독한 마음을 품고 나를 병들게 한다. 찰랑찰랑 소리가 날 때 한 번씩 톡톡 털어줘야 하는데, 가끔 그 시기를 놓치곤 부정적인 생각 꼬리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나면 너무 갔다 싶은 거다. 그게 현실 가능한 욕심이야? 그런 세상이 존재하냐고. 아니, 존재할 거라 생각해? 도리어 묻고 싶어진다.
(돈 안 들이고 죽기 위해) 영양실조로 자살해 임종을 맞이하겠다는 친구의 계획을 마주했을 때는 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너가 오늘 안 죽으면 기다려야 하나?"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꽤 아팠다). 고기 값을 계산하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치고, 낡은 폐지를 서로 갖겠다며 핏발을 세우고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 말문이 막히다가도, 그럼 내 인생은 뭐 얼마나 대단한가 싶어 눈물 섞인 웃음이 났다. 염치없는 손자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다가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걸,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기도 했다. 돈이 뭐길래, 사람이 뭐길래, 그토록 소중하다 외치던 가족들은 다 어디 갔느냔 말이다. 부질없다, 진짜.
얼마 전에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와 이토록 암담한 세상이라니' 싶어 마음이 울적했는데, 이 영화 덕분에 삶을 바라보는 각도가 달라진 기분. 편협한 시선에서 살짝은 멀어진 것 같기도 하고. 괄괄한 세 노인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다가, 울다가, 다시 또 웃다가. 좋은 영화였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애틋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삶을 고치고 또 고쳐가며 살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한다. 고장나는 것이 두려워 방어만 한다면 그것 또한 겁쟁이가 아닐까.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보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함께 감상을 나눠보고 싶다. 그리고 이 질문을 건네고 싶다.
당신이 상상하는 당신의 노년은 어떤 모습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