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극을 영화로 옮긴다는 것
2022년 말, 윤제균 감독의 ‘영웅’이 개봉했다. JK필름과 윤제균 감독의 영화라는 이유로 개봉 전부터 시네필들의 우려를 잔뜩 받았고, 개봉 후에도 평가는 사실 썩 좋지 않다. 이런 혹평 속에서 영화를 접해서 그럴까, 내게는 그렇게까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배우의 커리어에 있어서 자랑스럽지는 않아도 부끄럽지도 않을 것’이라는 어떤 리뷰가 기억에 남는다. 아쉬운 점이 많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연극을 스크린에 담으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였고, 꽤 마음에 들었다.
사실 윤제균 감독이나 JK필름의 전작들을 보면 억지 신파와 클리셰로 범벅된 작품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애국심에 호소하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조금 변호하자면, 애초에 이 영화는 원작 자체가 그렇다. 뮤지컬 ‘영웅’이 좋은 평가를 받고 흥행에 성공한 것을 제외하고 보면, 솔직히 스토리 자체에 참신함은 없다. 원래는 이토 히로부미 또한 영웅으로 그리며, 시대에 휘말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지만, 친일 논란 이후에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을 풀어내는데 그친다. 그리고 그러한 직선적인 이야기를 훌륭한 무대 연출로 잘 감추었을 뿐이다. 어찌 됐든 뮤지컬 <영웅>은 초연 당시 관련된 상을 휩쓸고 9회나 공연을 올릴 정도로 성공했다는 점이 중요하겠다. 그러면 왜 이토록 성공한 원작을 두고, 영화는 그저 그런 성적을 거두고 말았을까?
대학교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동해 본 경험이 있는 내게 연극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대 연출이라고 답할 것이다.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다양한 상황을 묘사하고, 관객을 그 상황 속에 배치하는 건 수많은 노력과 창의성이 필요한 일이다. 뮤지컬 <영웅>은 빛과 여러 무대 장치를 탁월하게 사용하여 이를 화려하게 표현했다. 예를 들어, 설희의 넘버 ‘당신을 기억합니다’에서 명성황후 시해 장면을 그림자를 이용해 감각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나, 일본군과 독립군의 추격 장면을 붉고 푸른, 대비되는 두 빛을 사용하여 묘사한 장면, 이토가 타고 있는 기차를 프로젝터로 영사하다 어느새 진짜 기차 모형이 등장하는 장면 등은 무대의 한계를 오히려 극적으로 이용한 신이다. 이런 화려한 연출로 직선적이고, 어떻게 보면 다소 인위적인 내용을 덮었다.
반면, 영화는 공간의 활용에 있어서 제약이 없다.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모든 장면을 CG를 이용해서라도 보여줄 수 있다. 위에서 말했던 ‘당신을 기억합니다’ 신에서는 명성황후의 최후를 회상으로 넣었고, 도주 장면은 하얼빈의 거리를 뛰어다니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 고안한 빛나던 연출이 사라지니, 평범하고 평면적인 그림만 남았다. 그러자 숨겨졌던 단순한 스토리가 부각되고, 그저 애국심에 호소하기만 하는 ‘JK필름 식’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의 특징을 살리다 보니 작품의 단점을 부각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영화보다는 뮤지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위 만두 CF라고 평가받는 ‘배고픈 청춘이여’ 넘버 장면에서 그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원작 뮤지컬에서는 이 넘버가 필요한 게 분명히 맞다. 하얼빈의 독립군을 뮤지컬적인 방식으로 소개하고, 그들의 처지를 관객에게 알리며,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분위기를 풀어주기까지 하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 매체에서는 꼭 필요한 장면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더 나은 방향으로 이 요소를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장면에서는 조도선과 독립군의 모습을 과할 정도로 코믹하게 그려내, 이어지는 비장한 모습들이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뮤지컬에서는 필요했던 아이스 브레이킹이 영화에서는 필요 없었던 셈이다. 감독이 기차역에서의 아리랑 장면을 배제하였기에 이 장면이 삽입된 것이 더욱 아쉽다. 덜어낼 수 있었는데!
사실 원작 뮤지컬이 너무 흥행하였기 때문에 감독 입장에서는 뮤지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안전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뮤지컬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조금 더 고민을 했으면 좋았겠다 정도? 약간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뮤지컬 실황을 보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런 와중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카메라 워킹 등은 영화적 느낌을 내고자 했던 건지 어떤 건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마이너스 요소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아무런 노력도 없이 원작의 명성에만 기댄 영화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이 영화보다 불과 3개월 먼저 개봉한 뮤지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와 비교하자면, 뮤지컬 장면은 더 낫다.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안중근 역에 뮤지컬 배우 정성화를 캐스팅하는 등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더 힘을 들였고, 뮤지컬에서 암전 되며 장면이 넘어가는 부분을 나름의 영화적 편집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등의 부분이 눈에 띈다. 특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연설하는 장면 직전, 신문을 클로즈업하며 전환되는 연출은 꽤 인상적이었다. 영화 자체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부분 부분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이 영화가 아쉬운 부분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감독의 의도가 어쨌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부분들을 캐치했고, 그렇게 느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윤제근 감독의 자질 부족이라기보다는 한국 영화가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를 시작하는 데서 비롯한 전반적인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어쩌면 단순히 연극을 스크린에 담기에 급급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이 모든 문제가 쌍 천만 감독이 안전한 흥행에만 초점을 맞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련의 다소 촌스러운 스토리와 연출 속에서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고민의 흔적이 나는 참 좋다. <인생은 아름다워>와 이 영화를 시작으로 한국 뮤지컬 영화가 더욱 발전해서, 나중에는 우리도 극장에서 빼어난 뮤지컬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대한민국에서도 데미언 셔젤 같은 감독이 탄생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