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버그의 예술은 삶을 어떻게 조명하는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파벨만스>가 2023년 3월 말 국내에 개봉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는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니만큼, 감독의 예술적 가치관이 듬뿍 녹아들어 있다. <쥬라기 공원>이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등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감독이, 예술과 삶에 관해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사뭇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스필버그 감독의 지루한 일기’ 라거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영화’라며 혹평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굉장히 치밀하게 짜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에 관하여 영화의 몇 부분을 떼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화는 주인공 ‘새미’가 생애 처음으로 극장에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새미는 그곳에서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영화에, 그중에서도 기차 충돌 장면에 매료된다. 그래서 새미는 아버지 버트가 하누카 선물로 사준 모형 기차를 충돌시켜, 영화의 장면을 재연하고자 한다. 버트는 이러한 새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머니 미치는 버트에게 ‘탄식 저음’에 관해 설명한다. 탄식할 만큼 슬픈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했을 때 아름다운 선율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차가 충돌하는 비극을 새미가 8mm 카메라로 찍어냈을 때, 새미는 비로소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작품 초반, 미치는 영화를 꿈이라고 표현한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비극을 영화로, 예술로 그려냄으로 아픔을 치유하고, 삶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감독은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로건과 클라우디아는 미치와 버트에 대응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새미는 영화를 통해 로건과 클라우디아가 재회할 수 있게 했지만, 그의 가정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 차이는 새미가 감독으로서 영화를 통제했는가이다.
작 중 새미는 몇 개의 영화를 찍는다. 새미가 찍은 모든 영화가 전부 중요한 상징이나, 그중 몇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첫 번째 영화는 미치의 이야기를 담은 캠핑장에서의 홈 무비이고, 두 번째 영화는 아버지의 전쟁담을 담은 이다. 두 개의 영화는 모두 새미가 통제하지 못한 영화이다. 첫 번째 영화에서는 본인이 무엇을 찍고 있는지조차 몰랐고, 두 번째 영화에서는 감정에 이입한 배우가 새미의 지시를 무시하였다. 새미가 본인의 예술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새미는 가족의 아픔을 치유할 영화를 찍고자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국 버트와 미치는 결별 하였다. 반면, 캘리포니아에서 여자친구의 권유로 찍게 된 <땡땡이의 날> 영화는 당초에 계획한 바를 철저하게 이룬, 새미가 비로소 통제하는 데 성공한 영화이다. 그래서 그 영화의 힘으로 클라우디아와 로건은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끝에 가서 새미는 자신이 어릴 적 동경하던 감독인 ‘존 포드’를 만난다. 그는 영화감독이 되려는 새미에게 예술을 하려는 이유를 묻는다. 새미가 “감독님의 영화를 사랑해서요”라며 답하자, 그는 말을 끊고 새미를 한 그림 앞에 서게 한다. 그가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자, 새미는 인물에 관해 설명한다. 그러자 존은 화를 내며 지평선의 위치가 어딨느냐고 다시 질문한다. 그제야 새미는 지평선이 아래에 있다고 말한다.
존은 새미를 또 다른 그림 앞에 세운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고, 새미는 인물을 묘사하고, 존은 또 화를 내며 지평선이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 이번에는 저 멀리 위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존은 지평선이 위나 아래에 있는 것은 괜찮지만, 가운데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한다. 새미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 후 밖으로 나온 새미의 뒷모습을 로우 앵글로 잡았는데, 지평선이 가운데에 있다. 그러자 카메라가 살짝 움직여 지평선의 위치를 살짝 조정하며 영화의 막이 내린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스필버그 감독의 예술관을 크게 엿볼 수 있다. 새미가 예술을 하려는 이유를 말하면서 개인적인 감정을 근거로 들었을 때, 존은 화를 냈다. 또 새미가 그림 속 인물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화를 내며 지평선의 위치만 묻는다. 예술에 있어서는 인물 개개인의 희로애락보다, 그것의 지평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 즉 어떻게 담을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장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이야기는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에, 감독이 실제 겪었던 이야기들과 본인의 예술적 가치관을 담았다. 그리고 이 영화 자체가 본인의 그러한 예술론을 작품으로 보여주기 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에게 좋은 일은 사실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에 가정은 파탄 났고, 첫사랑과도 헤어졌으며, 원하던 영화 쪽 일이 아닌 드라마 일을, 그것도 조수의 조수의 조수 자리를 제안받는다. 그럼에도 영화가 어딘가 해피 엔딩으로 끝난 것 같은 이유는 이 영화가 새미의 개인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러한 사건들을 그렇게 조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감독은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하며, 다양한 메타포와 상징을 작품 곳곳에 배치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감독의 개인적인 비극을 예술로 조명하였다. 영화 내에서 감독이 보여준 가치관은 이 작품을 그리는 데에 모두 투영되어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감독의 주제 의식도 명확하고, 그것을 또 몸소 표현한,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영화인가 하면 아마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의 주제 자체가 꿈, 예술, 영화 등에 관한 것이다 보니 데미언 셔젤 감독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셔젤 감독의 최신작인 <바빌론>에서는 일종의 훌륭한 무대 장치와 음악을 통한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서, 본인이 꿈과 영화와 음악과 예술을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하면서도, 관객에게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해 지루할 틈이 없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셔젤 감독의 영화보다 조금 더 딥한 내용을 불친절하게 다루고, 솔직히 볼거리도 딱히 없다는 점에서 2시간 반의 러닝 타임이 조금은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예술을 사랑하고 영화를 어떤 마음가짐에서 찍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말해 개인의 삶보다 영화가 더 중요하다는 예술지상주의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이야기를 하니 말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영화와 예술, 현실과 꿈 등에 관해 깊은 고찰을 했던 사람들을 더 좋았을 것이다. 또, 스필버그 감독과 영화를 잘 아는 사람들은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판할 요소도 매우 많은 그런 호불호 갈릴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약간 두릅 같달까? 그 맛을 알면 맛있지만, 모르면 그냥 씁쓸하기만 한 두릅. 나는 스필버그 감독도 잘 모르고, 영화도 잘 모르지만, 예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고,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시네필들이 느끼는 어떠한 뭉클함을 느낄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