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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부 Feb 28. 2021

<당신은 왜 걷고 있나요?> 사만다와의 대화

산티아고를 걷는 각자의 이유 


사만다는 25살의 미국인이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두 번째 알베르게였던 발칼로스 알베르게에서였다. 생장에서 불과 10km 미터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도 저녁 늦게서야 도착한 사만다의 얼굴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알고 보니 길을 잃어서 생장에서 반대 방향으로 10km를 걷고 다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첫날부터 거의 30km를 걸은 셈이다. 그런 연유로 사만다는 밤늦게 빨래를 하고는 밖에 널고 있었다. 나는 굳이 오지랖을 부리는 일이 될까 봐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저렇게 열심히 빨래했는데 내일 마르지 않은 옷을 입으면 속이 상하겠지 싶어서, 내일 일기예보를 보여주며 내일 새벽부터 비가 올 것 같으니 숙소 안에 말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다행히도 그날 알베르게의 히터는 아주 완벽히 빵빵했고, 사만다의 옷은 아침까지 다 말라 있었다. 그렇게 안면을 트게 된 친구였다.


다음날 혼자 걷는데 누가 뒤에서 인사를 하기에 돌아보니 미국인 켄과 사만다가 함께 걷고 있었다. 미국 캔자스주에서 왔다는 켄은 젊은 농부였는데, 미국 부농에 관한 내 이미지만큼 켄도 상당히 부유해 보였다. 동작 하나하나에 여유가 느껴진달까. 도시에서 팍팍하게 앞날을 걱정하며 사는 21세기 보통의 밀레니얼 젊은이들 같지 않은 여유가 느껴졌다. 그는 지금은 농한기라 유럽을 둘러보러 왔다는 매우 부러운 친구였다. 사만다는 경제 쪽에서 일했지만, 의학 쪽으로 커리어를 바꾸는 준비를 하며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까미노를 걷는다고 했다. 나는 들으면서 속으로, '파이낸스 쪽에서 일했는데 재미없어서 의대 준비를 한다고..?? 그게.. 가능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면서 적당히 넘겨들었더랬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났다. 같이 걷고, 이야기 나누고, 밥을 나누어 먹으며 조금씩은 친해지는 중이었다. 사만다가 물었다.


너는 왜 왔어? 
음 사실, 나 깨져서 왔어. 그래서 마음도 깨졌고. (Actually, I broke up. So my heart is broken too.)


간단한 대답이었다. 아직 까미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고, 나는 아직 더 길게 내 이야기를 말해 낼 힘이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 broke라는 라임을 맞추어 말하고 싶어서 신중히 고른 단어들이었지만 말이다. 사만다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뒤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난 공식적인 이유로는 커리어를 고민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해. 근데 사실 나도 내 동생을 잃어서 왔어. 석 달 전에 동생이 사고로 죽었거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 아.. 너 많이 힘들었겠다.

응. 그러다가 산티아고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걸으면서 생각하고 싶었거든. 내가 사랑한 동생을 그리워하고 싶었어. 잘 떠나보내주고 싶어서.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그제야 조금 이해되었다. 어쩌면 경제 분야에서 일하던 사만다가 의학 분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것도 동생의 죽음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기로 했다. 아직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입 밖으로 많은 것들을 꺼내놓기엔 말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지치고 힘겨우니까. 너무 힘들 땐 타인의 관심이 더 부담스러운 법이니까. 한참을 걷다가 사만다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둘 다 뭔가를 잃어서 왔네. 너는 사랑을 잃어서 왔고, 나는 동생을 잃어서 왔으니까."
나는 물었다. "이 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응, 나는 그러길 바라. 우린 꼭 그럴 수 있을 거야. 근데 일단 이게 너무 힘드니까 다른 생각 안 나지 않아? 내 머릿속엔 벌써 온통 한 발자국만 더! 한 발자국만 더! 커피! 커피! 이 생각밖에 안나!"
"하하 맞아. 나도 그래."
"그나저나 진짜 다음 바(bar)는 얼마나 남은 거야? 배고파. 따뜻한 수프랑 빵 먹고 싶어."


그날 저녁, 사만다와 켄은 닭요리를 해 먹는다고 했다. 켄의 요리 솜씨를 잘 알기에 나도 먹고 싶었지만, 요리까지 같이해 먹기에 그날 내 체력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남이 해준 따끈한 음식을 먹고, 설거지 신경 안 쓰고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오늘은 미안, 둘이 맛있게 먹어.라고 말하고 일찍 잠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일찍 출발했다.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사만다와는 그날 이후로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까지 만나지 못했다. 같은 길을 걷다 보면 꼭 다시 만나기 마련인데 못 만났던 걸 보면 걷는 속도가 많이 차이 났다거나, 다음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끔 사만다가 생각난다. 사만다는 산티아고까지 걸었을까? 사만다는 동생을 잘 보내주고 돌아갔을까? 우리가 만났을 땐 길의 시작이었는데, 길 끝에서 그녀는 무슨 생각들을 하게 되었을까? 많은 것이 그립고 또 생각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그리운 그대로 묻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다시 한번 사만다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커리어 전환이 무탈하게 잘 진행되고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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