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 왜 갔냐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을 말했다. 한 마디로 차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영화 장르로 치자면 기승전결이 완만한 사랑과 이별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시작부터 포탄이 한꺼번에 다 터지는 헐리우드 재난영화 같았다. 뭐가 그렇게 갑작스럽고 충격적이고 모든 게 파괴되는지. 우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 말 한마디로 우린 끝이 났다. 일주일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나? 아니 이게 방구인가, 말인가, 방구같은 말인가? 그 다른 사람이란 걸 만나기 불과 3일전까지 우리는 사랑의 맹세를 나누고,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는걸? 이 소리도 안되는 뚱딴지같은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내가 믿든 말든 흘렀다. 한 달. 기차역에서 떡을 먹는데 갑자기 숨이 빨라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가만히 있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집중폭격을 당하는 마음이 와장창 무너져서 그 마음에 눌려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늘 위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포탄들이, 아찔해졌다. 어떻게든 살고 싶었기에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려고 계획해 둔 일들이 있었지만 모두 놔 버렸다. 도망치기로 했다.
당시 나는 요가를 하고 있었다. 요가를 시작하게 된 건 처음엔 단지 그 사람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였다. 새해 목표로 건강한 일상을 꾸리자고 약속했더랬다. 1월 1주차에 등록하고 3주차에 차일 줄도 모르고. 그 사람에게 예쁨 받고 싶어서 시작했던 요가는 하필이면 3개월 패키지 상품이었다. 결국 내 요가는 연애보다 이별에 더 도움이 되었다. 사바사나를 하는데 문득 '산티아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다음은 그날의 일기다.
산티아고에 가자. 순례자처럼 걸어보자. 마음을 비우고 그냥 걸어보자. 산티아고가 어디 붙어있는 곳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냥 산티아고가 좋을 것 같아. 마침 이유를 다 이해하기 어려운 실연도 당했고,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고, 어차피 망하고 어차피 늦은거 더 천천히 가도 되지 않겠나. 이 정도면 산티아고에 가기 충분한 이유 아닐까. 인생길을 너와 같이 걷고 싶었지만, 걷다보면 나 혼자서도 잘 걷지 않을까. 이 길을 걷다보면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
결심을 한 것이 저녁 10시 수업 요가였고, 다음 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나는 까미노 위에 있었다. 준비는 다 어떻게 했냐고? 1주일 동안 나는 산티아고가 어느 나라에 붙어 있는 곳인지 알아보는 일부터, 준비물 쇼핑을 다 하고, 속성으로 체력을 기르기 위해 하루 백 개 스쿼트까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몽땅 해치웠다. 아 그리고 그 일주일 사이에 정신과에도 다녀왔다. 사실 별 생각은 없었다. 이별하면 원래 다들 힘들지 않나. 그냥 그런거겠지.
네? 근데 제가 지금 우울증이라고요? 기차역에서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빨라 졌던 게, 그게 공황증상이었다고요? 어라, 나 연예인 아닌데. 우와 신기하다. 의사 선생님은 나를 보내는 게 영 불안하신 눈치였다. 꼭 가야겠냐는 말을 하셨지만 이미 비행기표를 끊었는데 어쩌겠나. 결국 온갖 짐을 다 줄여야 사는 까미노 길에 46일치 우울증 약까지 두둑하게 받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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