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보퓨레 Jul 18. 2022

토끼마을에 걸린 로스코

토끼와 회색늑대의 고단한 생존이야기


"이랬다 저랬다 하는 정부 놈들 때문에 꽤나 힘들었겠어." 무리의 대장 역할을 하고 있는 파랑 토끼 테일러가 말했다. 그는 그다지 쓸모없어 보이는 모빌을 흔들며 무리의 구성원들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이쯤 되면 늑대라는 종족이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늑대 히어로 쯤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가망이 없어." 테일러의 심복으로 마을의 벽화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수의 발언이었다. 그는 최근 시작한 추상작업을 시도해 볼 참이었다. 토끼족의 위대함을 표현하려면 무슨 색을 써야 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배윤환, <송곳니들을 위한 자장가>, 2022


사실 토끼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저 인간에 의해 이쪽 섬에서 저쪽 섬으로 몇 마리가 옮겨졌을 뿐이고, 영국에 비해 터가 좋았던 호주에서 항상 그래왔듯이 땅굴을 파고 나무뿌리를 파먹으며 생존했다. 그리고 번식했다. 아니 우리 식으로는 번영했다고 해야겠지. 한때 자연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가리라 생각했던 인간들의 잔혹한 토끼 죽이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울타리를 치고, 포상금을 걸고, 보금자리에 다이너마이트를 쑤셔 넣었다. 하지만 토끼는 자신들이 어떤 민족인지 몰랐던 그들을 비웃어줬다. 더 많은 땅굴을 파고, 농작물을 훼손했다. 이 좋은 땅에 한 번 들어온 이상, 절대 내 발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힘차게 번영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인간의 콧대를 시원하게 꺾어줬다고 생각했다.


배윤환, <송곳니들을 위한 자장가>, 2022


늑대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느끼는듯 보였다. "이봐 제이미. 이제는 받아 들여야 해." 테일러가 쓸데 없는 모빌을 다시 한 번 흔들며 말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든. 그냥 시원하게 울어버리고 지금을 받아들이자구. 앞으론 우리가 돌봐줄 테니까." 인간들은 회색 늑대를 조롱하고 능멸했다. 멸종 위기라면 극진히 대접할 땐 언제고, 자신의 가축들에 손을 댔다는, 아니 발을 댔다는 이유로 개체 수를 줄이자며 칼날을 들이밀었다. 테일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는 그 사건 이후 인간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중단했어. 사람과 관련된 건 사람들과 피부를 부비는 포메라니안 한 마리가 유일해. 그쪽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이거든."


배윤환, <송곳니들을 위한 자장가>, 2022


인간은 결국 바이러스를 퍼뜨리기로 결정했다. 토끼에게만 치명적인 해를 가하는 바이러스. 수 많은 동족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고, 파란 털의 테일러도 가족을 잃었다. "미친 거야. 그런 것에서 자신감을 얻은 건지 이제는 자기네들끼리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거 같더라고. 물론 겉으론 아니라고 하면서." "하지만 토끼는 살아남았지." 한쪽 귀를 쫑긋 세우고 테일러의 이야기를 듣던 회색 늑대 제이미가 대화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우리도 가만있지 않겠어. 뭔가 보여줘야 할 것 같아." "그래 늑대 친구, 아웃도어 브랜드의 캐릭터로만 기억되고 싶지 않으면 정신 차려야 될 거야. 아 그 녀석은 여우였던가?" 수가 잠시 붓을 내려놓고 말을 이어갔다. "저기 저 그림 보라고.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이 온간 핍박을 이겨내며 성공시킨 그림이야. 그 놈들은 자기네들끼리도 배척하고 차별하는데 혈안이 돼 있다고. 사람들은 아주 심보가 못돼 처먹었어. 대개는 그들의 작품은 가치가 없지. 하지만 개중에도 저렇게 멋지게 이겨낸 녀석 정도의 작품은 우리 마을에 걸어 둘만 하거든."


마크 로스코, <green, blue, green on blue>, 1968


배윤환, What? In My Back Yard?!

2022.06.29~07.30

갤러리바톤

작가의 이전글 오늘의 나는 제대로 비워졌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