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볼만한 전시가 없는지 서칭하다 하이주얼리 브랜드 불가리의 전시 소식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해당 소식에 큰 인상을 받지는 못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제가 럭셔리 브랜드들의 전시를 열렬히 참석했던 것은 2020년 즈음까지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루이비통, 반클리프아펠과 같은 초 럭셔리 브랜드들이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비롯한 전문 전시 공간에서 그들의 제품과 히스토리, 그리고 예술성을 선보인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었죠.
굉장한 감동이었던 2017년 루이비통의 VVV 전시 @DDP
요즘은 럭셔리 브랜드 치고 예술(Art)을 건드리지 않는 브랜드가 있을까요? 패션과 예술을 모두 좋아하는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때로는 어설프게 흉내만 내는 브랜드들의 성의 없는 기획에 실망할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요즘은 브랜드 팝업스토어 소식이나 전시 소식에 예전처럼 세포들이 깨어나는 느낌을 받기는 좀 어렵더군요.
신선하게 다가왔던 불가리의 예술의 전당 전시
불가리 마케팅팀도 어떻게 브랜드와 아트를 엮어볼지 부단히 고민하고 실행해왔을 것입니다. 사실 하이주얼러인 불가리는 자사의 제품인 주얼리와 보석(스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자,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장르이기에 헛스윙만 하지 않는다면 진루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일례로 불가리는 2021년에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를 진행했는데, 그간 럭셔리 브랜드의 전시는 죄다 DDP에서만 열린다는 인상을 받던 찰나에 '예술의 전당'이라는 워딩만으로도 굉장한 신선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일반적인 하이주얼리 제품 설명회 정도의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었죠. 불가리도 아마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훗날 홈런 한 방을 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을 것입니다.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전시 포스터 이미지, 출처: 불가리 홈페이지
다시 오늘로 돌아와 제가 흔한 전시인 줄만 알았던 불가리의 이번 전시 소식에서 '아하! 모먼트'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이유는 이번 전시가 국제 갤러리에서 열린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저 친구는 공간만 새로우면 만사형통인 스타일인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일부는 맞을지도...) 국제갤러리에서 브랜드 전시가 열린다는 사실은, 보다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맛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줄리안 오피 전시가 열렸던 국제갤러리 K2, K3 관 ⓒ아보퓨레
북촌 3대 갤러리이자(아보피셜...) 한국을 대표하는 갤러리 중 하나인 국제 갤러리는 전통적으로 해외 유수의 작가와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고, 나아가 이제는 한국의 작가들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우리나라 예술의 중추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갤러리입니다. 행동은 모든 성공의 근본적인 열쇠라고 피카소 형님이 말씀하셨었죠. 무언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실행해왔던 불가리가 이번에는 국제갤러리라는 제대로된 방향을 잡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입니다.
2016년 갤러리아 EAST를 수놓았던 불가리의 세르펜티, 출처: 갤러리아 홈페이지
평소 주얼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하이주얼리의 대장 까르띠에에 팬서(표범)이 있다면, 이탈리아의 자존심 불가리에게는 세르펜티가 있습니다. 세르펜티는 이탈리아어로 뱀을 의미하는데, 서양에서는 지혜와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불가리에게 세르펜티 75주년이라는 기념할만한 이슈가 있는 해이기도 하죠. 불가리는 세르펜티를 주제로 고객과 대중들을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제 공은 국제 갤러리에게 넘어갈 차례입니다.
천경자, <사군도>, 1969
국제갤러리는 글로벌 브랜드가 제시한 뱀이라는 키워드를 한국적으로 풀어내는 멋진 모습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한국의 뱀 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한 분 계시죠. 바로 뱀과 담배의 예술가 천경자 선생님입니다. 뱀을 그리는 여성작가로 시대를 풍미했던 천경자 선생님에게 뱀은 저항의 표현이었는데요. 여성 작가로 살아가며 겪은 어려움을 뱀이라는 상징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던 작가의 정신이 때로는 매혹적으로, 때로는 매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홀려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기쁨. 고뇌를 맛보게 했다는 창조의 요술사, 요기로운 광채와 지성의 뱀님을 한 더 그려볼까 한다" - 천경자, <탱고가 흐르는 황혼> -
어서 주말이 되어 제 눈으로 이번 전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오늘은 주얼리 브랜드 불가리가 정통 미술 갤러리인 국제 갤러리와 협업한 전시를 소개해드렸는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불가리 x 국제 갤러리]의 전시, 매력적으로 느껴지시나요?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전시 국제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54) 2023.06.23~07.31 무료 전시(네이버 예약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