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크루 훈련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열차를 갈아타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입문 쪽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휘청. 남자가 잠시 중심을 잃었다. 술을 마신 건가? 다시 한 번 휘청. 문 모퉁이에 서 계신 어르신과 어깨를 부딪쳤다. 열차 문이 열리고 다섯 발자국쯤 움직인 그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플랫폼에 서 있던 모두의 시간이 멈췄다. 나 또한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직업 특성상 응급 구호조치 교육을 여러 차례 받은 덕분에 몸이 손발이 먼저 움직였다.
아니쉬 카푸어 展 ⓒ 2023. 아보퓨레. All rights reserved.
옆으로 쓰러진 남자를 바른 자세로 눕히고 손으로 후두부를 받쳤다. 오른손으로 눈 앞에 보이는 남성을 가리키며 외쳤다. 지금 저랑 눈 마주치신 남성분 지금 바로 119로 신고해 주세요. 책임지고 하시는 겁니다! 쓰러진 남자는 호흡이 살아있었고, 다행스럽게 십여 초가 지난 후 눈을 떴다. 잠시 그대로 누워 계세요. 방금 쓰러지셨습니다. 충분히 안정을 찾은 것을 확인하고 바닥에 함께 앉아 상황을 공유했다. 몇 해 전 뒤로 쓰러져 머리가 깨진 친구를 병원에 데려 간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를 진정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참 후 구조 대원이 도착했고 119에 신고를 도와줬던 시민과 나의 시간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 2006
얼마 전 프리즈를 관람하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쉬 카푸어 참 재미있어. 모든 갤러리가 그의 작품을 거는 것은 아닌데, 걸었다 하면 약속이나 한 듯이 가장 중심부 떡 하니 걸어두잖아. 아니쉬 카푸어가 대중에게 그의 예술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것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개방감 있는 공간에 놓인 거울처럼 반짝이는 구조물은 세상을 두 배로 확장시킨다. 볼록한 곳은 사물을 커다랗게 비추고 오목한 곳은 공간을 널찍하게 만든다. 미적으로 아름다운 그의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들은 어딜 가나 주목 받았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명물이 되었고, 한남동 리움 미술관 가면 꼭 봐야 하는 작품이 되었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림보로의 하강(Descent into Limbo)>, 1992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는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전해기도 전에 작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사람들을 매료시켜 버렸으니. 그는 다음 소재로 빛을 99.965% 흡수하는 반타블랙이라는 물질을 선택한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으니 괜찮겠지?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반타블랙은 아니쉬 카푸어라는 작가에게 더욱 큰 유명세를 가져다주었다. 바닥에 공간을 파내고 반타블랙 염료를 칠해 공간감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 작품 <림보로의 하강>에서는 실제 사람이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반타블랙 제조사인 서리 나노시스템즈(Surrey NanoSystems)로부터 반타블랙의 예술적 사용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돈으로 구매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는 칭찬과 욕을 동시에 먹는 세상에서 가장 핫한 작가가 되었다.
아니쉬 카푸어 展 ⓒ 2023. 아보퓨레. All rights reserved.
최근 그는 가장 날것의 생각을 들고 다시 한번 우리를 찾아왔다. 빨갛고 까만 물감이 뒤섞인 작업들과 함께. 인체의 장기가 연상되는 작품들을 보며 우리는 이제서야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고민해 보게 된다. 이것은 생(生)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사(死)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저기에 있는 혀는 죽은 이의 말려가는 혀인지, 목마름 끝에 찾은 물 한 방울을 마시기 위해 힘차게 뻗어내는 혀인지. 그제야 스테인리스스틸이나 반타블랙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가 다가온다. 물질과 비물질. 존재와 부재.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그 어딘가의 경계, 그리고 그 경계에 대한 인식.
아니쉬 카푸어 展 ⓒ 2023. 아보퓨레. All rights reserved.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프리드리히 니체는 후대에 도래할 허무주의를 예견했다. 그리고 절대적 가치가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에 모든 의지를 포기하는 수동적 허무주의가 아닌, 궁극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만의 삶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능동적 허무주의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니쉬 카푸어는 우리에게 씌워진 절대적인 프레임들을 깨부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한다. 반짝이며 세상을 비추는 작품은 그 자체로 세상의 연장선일 수도 있고, 여전히 고철 덩어리일 수도 있으며, 새까만 동그라미는 계속 동그라미일 수도, 뽀족한 세모 일 수도 있다.
러닝 크루 훈련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열차를 갈아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생과 사의 경계가 그리 먼 것이 아님을, 동시에 아주 먼 것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아니쉬 카푸어의 새빨갛고 까맣던 작품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