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족과 통화할 때는 자연스레 사투리가 나오고,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평소에 하지 않던 녹진한 욕들이 대화를 파고든다. 예전의 나는 그것들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라 여겼다. 마음만 먹으면 서울말을 구사할 수 있고, 실수로 상스런 말이 튀어나오는 경우는 없을 거라고.
30대 초반에 형이 서울로 늦깎이 상경을 하여 반년 가량을 함께 살았다. 그리고 불과 몇 달 만에 직장 동료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대리님, 요즘 사투리가 좀 티나요." 대학 때부터 부모님께서 해외로 가신 탓에 방학 때도 항상 서울에 머물렀던 내가 아니었나. 아마도 퇴근 후 집에서는 형과 정겹게 사투리를 써가며 대화한 탓이었으리라. 아니 그건 그렇고, 이렇게 빨리 통제 밖의 영역으로 진입했다고?
감추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바른 자세로 서 있을 수 있게 허리춤을 잡아주던 마음의 손이 사라진다. 자세는 한없이 삐딱하고 구부정해진다. 어떡해야 할까? 먼저 통제력이 높은 상황으로만 환경을 조성할 수 있겠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노출시키지 않는 것. 너무 바쁜 상황은 피하고, 술은 줄여야겠지. 실제로 일부는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겠지만, 주로 회피를 기반한 해결방안이라 절대적인 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투리를 없애려고 가족과 연락을 줄일 수는 없으니까.
통제력을 높이는 것과 더불에 '보통의 나'에 변화를 주는 것은 어떨까. 친구들을 만나도 욕은 하지 않고, 혼자 운전하는 경우에도 타 운전자를 비방하지 말아 보는 것. 다정한 호칭으로 연인을 불러보는 것도. 이런 평상시의 트레이닝은 통제력이 낮아지는 상황에서도 본연의 나로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난주 고교 동창의 청첩장 모임에서 구수하고 친근한 사투리와 욕을 남발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향점이나 요즘말로 추구미로서 내가 원하는 모습을 연습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과가 되지 말고 도마도가 되라.'는 북한 속담이 있다. 북쪽에는 겉과 속이 같은 색인 토마토가 배신하지 않는 충성의 상징으로 쓰였다. 남쪽에서는 정치적인 뉘앙스를 빼고 생각해 보면 좋겠다. 본래의 나와 너무 다른 색채로 스스로를 포장지 않는것. 물론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서 100% 나로 살라는 말은 아니다. '나'라는 코어를 잃지 않을 정도면 충분하다.
꽃을 그리는 프랑스 화가 미셸 앙리의 작품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가 그린 꽃들은 모두 투명한 크리스털 병에 꽂혀 있다는 점인데, 덕분에 관람자는 꽃잎은 물론 꽃의 줄기까지도 볼 수 있다. 작가가 꽃의 줄기까지 굳이 보여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발언 중 하나에서 그 의미를 유치해 봐도 좋겠다. 오늘도 투명한 그릇에 나를 담는 연습을 해야겠다.
"만약 제가 색상으로 장식된 예쁜 도자기 화분의 꽃을 꽂으면, 그건 꽃의 매력을 반감시킬 것입니다. 크리스털 유리병에 꽂힌 꽃은 진실합니다."
위대한 컬러리스트 미셸앙리 展 10.18-11.17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유료전시(성인 10,000원) 10:00-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