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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퓨레 Nov 06. 2024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하정우 : Never tell anybody outside…  展

피렌체 여행 중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소식을 접했다. 조깅을 하려고 막 일어난 새벽녘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깨 헛것을 본 건가? 혹시 몰라 뉴스를 검색해 봤다. 한국이 노벨 문학상이라니.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침대에 앉아 기억을 되짚었다. 대략 10년쯤 전이었을까. 작가가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 '채식주의자'를 읽었었는데... 혹시 내가 블로그에 독후감을 썼던가? 마지막 글이 올라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블로그엔 아쉽게도 독후감이 없었다. 아, 조금만 더 부지런했더라면...


당신은 어떤 스타일의 독서를 하고 있는가? 아마 연간 50권 이상을 읽는 속독(速讀) 형이자 다독(多讀) 형도 있을 것이고, 달에 한 권을 읽더라도 정성스레 읽는 만독(慢讀) 형도 있을 것이다. 나는 20대에 속독형을 부러워했고, 30대에 접어들어서는 만독형을 지향하며 독서생활을 하고 있다. 나의 독서에는 다소 독특한 행동양식이 있다. 바로 인상 깊었던 작품을 읽은 후에는 감상을 글로 남긴다는 것. 문학을 전공한 덕이기도 하겠지만, 오늘은 진짜 이유인 '주인공 병'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누군가 회사생활을 하며 가장 도움 된 책이 뭐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아들러의 심리학을 다룬 '미움받을 용기'를 꼽는다. 젊은 날의 나에게 두 가지 큰 통찰을 선사한 책으로 원인론과 목적론에 대한 담론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깨달음주었내용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이었다. 나름의 해석을 가미해 이해한 바는 이러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우리가 우주의 주인공이자,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주입받는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보라. 세상이 주인공만으로 돌아가는가? 우리는 감초역할의 조연일 수도, 어쩌면 한 컷도 나오지 못하는 엑스트라일수도 있다.


나의 주인공 병은 오랜 기간 나를 옥죄어 왔다. 학생 때부터 농구를 좋아해 지역 연합 동아리 활동까지 했던 나는 정작 최고의 플레이가 펼쳐지는 NBA중계는 보지 않았다. 나 자신이 그러한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점이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독특한 현상 중 하나 정도로 치부했던 상황이 티비를 보다 중첩되는 경우 잦아졌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며 '나는 왜 지금 남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만 넋 놓고 쳐다보고 있는가'하는 자괴감에 애써 전원을 끄길 반복했다.


학생회장, 장학금, 그룹연수 1등. 아슬아슬하게 이어오던 나의 주인공 생활은 20대 중반 즈음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회사에서 제공하는 해외 프로그램에 2년 연속 탈락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그려놓은 대기업 성공 스토리와는 맞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어린 마음에 당시 나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던 거야?'


다행히 나는 정말 운이 좋게 이 시기 아들러 형님을 만났다. 그리고 더 이상 숨 헐떡이는 주연이 아닌, 감초 역할의 조연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했다. 그제야 못하는 것들을 즐기며 '나'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체력이 약한 유리몸을 가졌음에도 달리기를 시작했고, 친구의 권유로 전시회를 다니며 작가와 작품을 공부해 나갔다. 뭐든 완벽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적시에 써먹을 수 있는 한방을 갖추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병은 좋은 방향으로 호전돼 나는 감상과 해석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작품내 손에서 탄생한 것 아니지만, 작품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흥미로운 조연의 역할을 즐기게 됐다. 이러한 마인드의 변화는 나를 더욱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주인공들을 소재로, 그들을 조명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비평가로서 이런저런 글을 써 나갔다. 감초역할을 알아봐 주는 분들 덕분에 부족한 글을 좋은 지면에 싣는 기회도 간혹 얻었다. 그야말로 '신스틸러'가 된 것이다.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진짜' 주인공, 배우 하정우는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배우 감독의 인형에 그칠 수 있는 존재라 여긴다. 그래서 공허하고 그래서 허탈하다. 그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미친 듯이 걸어보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그는 붓을 들었다. 처음부터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매년 표현을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 총 14번의 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국내 메이저 갤러리 중 하나인 학고재에 도달했다. 미술 씬에서 하정우 작가는 적어도 매력 있는 조연 멋지게 자리매김했다.


며칠 전 회사 후배에게 '채식주의자'를 빌렸다. 이번엔 다 읽고 느낀 바를 적어봐야지. 조연이 돼라고 했지 게을러져도 된다고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정우 : Never tell anybody outside the family 展
10.16 - 11.16
학고재 갤러리(서울 종로구 삼청로 50)
무료전시
10:00~18:00(일요일/월요일 휴무)
ⓒ 아보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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