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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Mar 29. 2023

8. 론다여만 하는 이유

헤밍웨이가 사랑하고 릴케가 머물렀던 도시

단 한 문장의 글귀가 여행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다는 헤밍웨이의 말을 믿고 우리가 론다로 떠난 것처럼 말이다. 말라가에서 론다(Ronda)로 가는 길은 황금색이었다.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말라가에서 작열하던 태양은 론다로 넘어가면서부터는 기세가 조금은 꺾인 듯했다. 부드러운 노을이 들판을 비추니 키 작은 올리브 나무들이 햇살 품에 안겨 솜털 같은 이파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스페인을 목적지로 삼고 이곳에서 삶과 경험을 절박하게 갈구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한 후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기분으로 지난 일 년을 보냈다. 외부에서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대신, 손에 잡히는 뚜렷한 성과나 인정 없이 일상을 스스로 채워야 하는 은 예상보다 버거웠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매일 변하지 않는 바깥풍경과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트레이드밀 위에 놓인 것 같은 나 자신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남편도 어쩐지 말이 없었다. 그저 둘의 눈만이 차창 밖 쉴 새 없이 흘러가는 늦여름 스페인의 풍경을 부지런히 쫓을 뿐이었다.




숙소는 깨끗한 겉모습과는 달리 역사가 있는 호텔이었다. 언젠가 마리아 릴케가 묵었다는, 그래서 정원에는 동상이 로비에는 작은 뮤지엄이 있는 호텔이었다. 또다시 ‘올라’와 ‘그라시아스’만을 남발하며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오니, 가장 먼저 널찍한 테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호텔의 장점은 목을 좋은 곳에 일치감치 잡은 덕에 대부분 경치가 좋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보니 사방으로 푸른 산자락이 펼쳐져있었다. 야자수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도 먼치에서 선명히 들려왔다. 그 아래에선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절벽을 따라 메아리를 울렸다. 그리고는 아주 깊고 긴 정적이 뒤를 이었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쓸려나가는 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다음날 호텔 밖으로 나가니 청명한 날씨가 하얀 도시를 진주알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 호텔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중심가로 가려면 그저 물이 흐르듯 낮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오 분쯤 걸었을까, 투우경기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론다 투우경기장이 나타났다. 약 오백 년 전 승마 연습과 경기를 위해 지어졌던 이 건물은 점차 시간이 흐르며 그 후 이백 년이 지나서는 투우 경기를 하는 곳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원형경기장에서 르네상스 시절 인간은 승마 연습을 했고 근대 시절에는 황소에게 작살을 꽂고 심장을 찌른 것이다. 현대의 인간은 투우 경기가 없어도, 단 한 방울의 피를 보지 않아도 소꼬리찜을 저녁식사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당일치기로 론다를 찾은 관광객들은 아쉬운 마음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듯 굳게 닫힌 경기장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도시를 둘러보는 남편의 얼굴은 나처럼 들떠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한평생 이곳에서 살아온 노인처럼 평온한 얼굴을 한 채 한 발짝 앞서 걸을 뿐이었다. 전날 밤 그는 난처한 얼굴로 업무 때문에 노트북을 켜야 하는데, 충전기를 찾을 수 없다며 안을 헤매고 다녔다. 아무래도 공항 검색대에서 챙기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결국 남편은 아침 일찍부터 론다의 전자상점을 헤매고 다녀야만 했다. 오전 내내 시내를 돌아다닌 남편에게 론다는 그새 나보다는 좀 더 익숙했을 것이다.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남편은 어딘가 피곤해 보였고 말을 붙여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짧았다. 그렇게 말없이 걷다 보니 오른편에 누에보 다리가 멀리서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서있는 이쪽 절벽과 구시가지가 있는 반대편 절벽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다리는 절벽만큼 깊었고 자동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튼튼했다. 다리 위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니 그 깊이가 굉장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포로들을 이 다리 위에서 떨어트려 죽였다는 전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말이다. 한참을 절벽 아래 풍경만 바라보며 부동자세로 서있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아름답다."

"그러네, 론다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야."

"응. 근데 난 너를 보고한 말이었어."

연애 때부터 남편은 종종 간지러운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곤 했다. 미소로 답하니 남편은 이내 마음에 담고 있던 말들을 꺼내놓았다.


"가끔 내 인생의 목표가 뭔지, 죽기 전에 이뤄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돼. 이렇게 일만 하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 너무 후회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스페인에 오기 얼마 전 남편은 회사 동료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육십을 갓 넘은 동료였는데 은퇴를 한지 몇 달 만에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생을 마치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의 고민은 내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 결은 같아 보였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는 방향은 어디인지를 그는 침묵 속에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남편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고, 남편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하늘도 푸르던 협곡도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절벽도 모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날이 저무니 선선한 바람이 옷 사이로 들어와 살갗을 간질였다. 그동안 남편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고 내 머릿속도 조금 개운해진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 사이 대화는 자연스러워졌고 웃음소리는 부드러워졌다. 태양보다 달의 밝기가 환해지자 우리는 다시 숙소로 향했다. 두 손을 꼭 잡은 우리는 드디어 헤밍웨이의 말을 이해한 듯했다.




다음날 동이 트기 전 나는 요가매트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잠이 쏟아졌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에서 요가를 하는 기쁨을 놓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테라스 아래에는 조식을 먹거나 산책을 하는 투숙객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도 내가 보이는지 시선을 위쪽으로 흘깃흘깃 던지곤 했다. 시선이 느껴지자 점차 나는 자신감을 잃어, 내가 하는 동작이 우스워 보이는 건 아닌가 혹은 휴가지에서 너무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휘말렸다. 평소 하는 것보다 조금 짧게 하고 들어갈까 하는데, 산책로 한 구석에서 홀로 요가를 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곁에 멈춰서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와도 그는 흔들림 없이 고요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자 그 곁을 지나는 사람들도 대화소리를 줄이거나 간격을 조금 넓혀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제야 나는 어제 남편과 나누었던 고민의 답을 조금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무언가 이루려고, 혹은 어딘가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다보면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혹여나 그곳이 너무 멀어도 그 여정을 즐기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요가를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멀리서 바람에 야자수가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박수갈채 같이 들려왔다.





론다 풍경, 2023, 비바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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