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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Nov 01. 2023

강아지와 들숨날숨

쓰읍 - 하

몸은 굳어버린 송장처럼 뻣뻣한데 벌건 두 눈만 말똥말똥 새벽이 지나도록 쉽게 감기지 않았다. 침대 아래에선 4개월 된 강아지 한 마리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남편과 나는 조용히 아래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여보, 우리 집에 진짜로 강아지가 왔어.




하니는 회색 문이 열리자마자 마당으로 우당탕탕 뛰어나온 여섯 마리 푸들 중 유일한 여자아이였다. 소심한 눈매의 조그만 갈색 강아지는 거친 남자형제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여가면서도 기죽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낯선 여자의 품에 안겨 자동차로 한 시간여를 오는 동안에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한 치 앞도 모른 채 아주 얌전히 잠을 잤다.


하니는 호기심이 많았다. 침대를 마련해 주던 나를 보던 하니의 눈에는 두려움보다는 궁금함이 가득 차있었다. 나는 이 강아지가 하루빨리 새 보금자리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집안 어디서 무엇을 하던 나와 남편은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고,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지도 않았다. 노력이 통했는지 일주일이 지나자 하니는 새로운 집에 조금씩 적응해 가는 듯 보였다. 불쑥 소파 위로 슈퍼맨처럼 뛰어들거나 카펫이나 옷소매 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는 게 그 신호였다.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는 도중에 하니가 갑자기 얼굴로 날아들어와 싸다구를 맞은 적도 있다. 너무 평화로워서 가끔은 무료하게 느껴졌던 일상에 마침표가 찍어진 것이다. 밖으로 나가려고 재킷을 챙겨 입는 찰나를 참지 못하고 집안에 오줌을 누었고 산책을 나가서도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길 한복판에서 당장 집에 가겠다고 사방으로 로켓처럼 뛰는 걸 보면서는 이게 저 조그만 강아지 몸에서 나올 수 있는 힘인가 싶어 두 눈을 의심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강아지와 함께하는 것은 매일 새로운 응용문제를 받는 것이었다. 하니가 집에 온 지 일주일, 내가 하니를 부르는 소리는 높아져갔고 우리 둘 사이의 줄은 늘 팽팽해져만 갔다. 그 줄의 한쪽 끝을 잡고 있을 때면 마음속에선 좌절, 분노, 당혹스러움 등 아주 다양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줄을 쥔 손에 힘을 더 주려다 한번 하니를 기다려주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 처음 느껴보는 촉감, 처음 나가는 산책 등 하니에겐 모든 것이 새로울 테니 말이다. 서른이 넘은 나에게도 여전히 새로운 것은 쉽지 않은데 이제 태어난 지 백일이 좀 넘은 강아지에겐 어련할까. 나는 천천히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하니 곁으로 다가가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쓰읍 - 하. 쓰읍 - 하. 쓰읍 - 하.


숨을 커다랗게 들이쉬고 내쉬자 호흡을 따라 산책줄이 오르락내리락 부드러운 진동을 울렸다. 평온하게 쉬고 있는 엄마와 졸린 형제들의 차분한 호흡소리를 기억하는 것일까, 끈을 따라 내 호흡이 하니에게 닿자 반대편의 강아지는 조금씩 곁을 내주었다. 심호흡을 하자 달라지건 하니뿐만이 아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며칠새 봄볕을 받아 더 뾰족해진 잔디와 곧 터질 듯 단단하게 맺힌 꽃봉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우리 한 호흡만 더 쉬어 가자‘.


그제야 하니가 집안일을 하는 나를 쫓아다니면서도 때로는 무언가 겁나는지 멀리서 쳐다볼 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차가운 부엌의 감촉이, 한시도 쉬지 않는 냉장고 소리가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담요 한 장을 집어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마침 왼편에는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오른편에는 냉장고가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자, 하니는 나를 곤란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주위를 빙빙 돌다 결국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포근한 침대도 안락한 소파도 마다하고 말이다. 이것이 강아지가 우리에게 마음을 쓰는 법이다.





하니를 만나고 나서야 늘 베란다에서 내다보기만 하던 벚꽃이 어떤 향기를 갖고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벚꽃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서 봄햇살을 쬐고 있으니 멀리서 윗집 아줌마가 반갑게 손짓을 한다. 평소 굳은 표정으로 스치듯 인사만 했던 이웃들이 세상 다정한 표정을 갖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게다가 독일인들이 이렇게 수다스러울 수 있다는 것도 하니를 만나기 전엔 미처 몰랐다. 두 블록 너머 양로원에 사는 노부부는 하니를 볼 때마다 몇 년 전 무지개 다릴 건넌 반려견이 생각난다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건너편 건물에 사는 두 살 된 올라스코라는 강아지는 한여름 더위를 피해 늘 창고에서 지낸다고 한다. 약국 앞에서 종종 마주치는 할머니는 자신은 나이가 많아 반려견을 들일 수 없다며 길에서 만나는 강아지들에게 간식을 나눠준다. 독일에 온 지 십 년, 이 동네에 살게 된 지 오 년이 되어도 알 수 없었던 것들을 하니는 한 달 만에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내가 강아지를 잘 훈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니가 내게 주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나는 앞으로도 하니에게 호흡으로 이야기해 주는 보호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하니와 노을 지는 해변가에서, 눈이 오는 설산에서 또는 비가 내리는 날 처마 밑에서 계속 함께 숨을 쉬고 싶다. 그리고 숨을 통해 알려주고 싶다.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면 사방에서 번쩍 거리는 불빛도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고양이도 있지만 우리가 서로 이 끈 안에 머문다면 우리는 안전하다는 것을 말이다. 집에서도 거슬리는 청소기나 세탁 가기가 낮잠을 방해해도, 함께 숨을 쉬고 있으면 그럭저럭 다 괜찮은 것처럼.


글을 마치려는데 하니가 참지 못한 듯 다시 패드를 흥건히 적셔놓았다.

쓰읍 - 하. 쓰읍 - 하. 쓰읍 - 하.

하니야, 산책 가자!





위의 에세이는 투룸 매거진 9월호에 연재되었습니다.

https://www.2room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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