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런 날이 있다. 할머니가 보고 싶은 날.
그냥 그런 날이 있다. 할머니가 보고 싶은 날.
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아를 형성했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입학해 할머니와 처음으로 떨어져 살기 시작하며 공허함이 나도 모르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스무 살 이전까지 부모의 자리를 대체한 할머니야말로, 내 인생,
내 우주의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그 공허함을 자취방 안에서 홀로 채우기엔 나는 너무도 미성숙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나. 서울의 새로운 삶을 접하며 할머니는 자연스레 내 삶의 전부에서 부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점점 대학생활에 익숙해지고, 학자금 대출과 월세에 치열한 삶을 살다 보니 할머니는 점점 잊혀졌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할머니의 얼굴을 보러 가는 횟수는 나날이 줄어들었다.
손바닥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한 알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것 마냥, 내 젊음을 일 분 일 초로 나눠가며 살았다. 그것이 나의 이십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치도록 할머니가 보고싶 은 날이 가끔 존재한다. 그런 날이야말로 내가 가진 고독과 공허함이 최고의 상태라는 뜻이다.
4년을 악착같이 버텨 낸 회사를 퇴사하고 온 오늘. 홀로 자취방에 돌아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누워있는 오늘. 할머니가 보고 싶다.
“민영아. 넌 한 자리하고 살 팔자여.”
할머니는 이상하게도 내 인생을 자주 펼쳐봤다. 점쟁이의 말인지 사짜 무당의 말인지는 모르겠다. 한 자리하고 산다는 팔자가 지금은 백수가 되었으니, 사짜 무당에게 들은 게 분명하다. 아마도 할머니가 그렇게 무당집을 들락거린 까닭은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기억 때문일지 모른다. 한순간 사라져버린 자기 자식에 대한 트라우마. 그리고 그 자식이 세상에 남기고 간 손녀딸만큼은 명줄 길게 살길 바랬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그 바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치열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세상 굴러가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한 자리하고 살 년’ ‘부모 잃은 불쌍한 내 새끼’로 종종 불려 왔으니까.
대단함과 불쌍함이라는 역설적인 두 타이틀을 한꺼번에 지닌 아이는 철이 빨리 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짐을 챙겼다. 그동안 치열한 사회에서 받은 피로감은 어느새 감당 못할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그랬기에 지금 할머니에게 가지 않으면 어쩐지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사실 힘들 때만 할머니를 찾아가는 날 보며 어떤 이들은 이기적이라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다.
뭐… 그렇다. 이기적인 게 맞다. 어릴 적부터 불쌍한 내 새끼로 불려 오며 세상에 대한 원망도 자연스레 생겼으니, 나 밖에 모르고 살아오긴 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란 것은 생각보다 무섭다. 어쩐지 세상이 나에게 어떤 보상이라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어릴 적부터 시련을 많이 겪었으니, 분명 특별한 사람이 될 거야. 와도 같은 착각인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차가운 사회에 홀로 내던져진 나의 현실은 아주 비참했다. 어른이 된 나는 빽도 뭣도 없는, 그저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됐을 땐, 이젠 더 이상 세상을 원망할 힘도 없게 되었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나라는 아이를 참 예뻐해야만 한다는 내 얄팍한 믿음마저 사라져 버린 셈이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지독한 무기력만 떠 앉고는 사회에서 스르륵 빠져나오게 되었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