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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 Jun 18. 2023

할머니 #3

중천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나를 깨웠다. 늘어지는 기지개를 켜며 거실로 나오자, 식탁 위에는 형형색색의 밥상 덮개가 국과 반찬들을 덮고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갔다. 

그래도 자고 나란 곳이라고 잠자리가 편안해서인지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냉수를 한 잔 들이키며 덮개를 살짝 들어 올려 보았다. 할머니가 혼자 있을 땐 절대 안 먹을법한 반찬들이 보였다. 

익숙한 잡채와 장조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픈 허리를 일으켜가며 새벽부터 반찬을 만들었겠구나 싶어 짜증이 확 밀려왔다. 다시 덮개를 덮어두고는 할머니를 당장 찾아 병원으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몰려들었다.


“동서~” 


그때 현관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리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어메? 민영이 아녀?”


귀를 찌르는 목소리 톤처럼 사나운 고양이 눈매를 가진 큰할머니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항상 그래 왔다는 듯이 자연스럽고, 무례하게 집안으로 들어오다가 멀뚱히 서있는 나를 보고 놀라는 듯했다. 큰할머니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할머니와는 차림새가 많이 달랐다. 

허리와 목이 아직도 꼿꼿해, 언뜻 보면 60대로 보이기도 할 정도로 정정했다. 그만큼 큰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손해 보는 일은 안 했다는 셈이다. 나는 식탁에 컵을 탁 내려놓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유 여긴 어쩌다 왔어? 휴가라도 받은겨?”


큰할머니는 살살 눈치를 보며, 특유의 훑어보는 눈빛을 보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런 말투는 익숙하다. 단순히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배려 없는 질문들. 큰할머니는 허락을 요하는 물음 대신, 궁금증 위주의 질문을 던지며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댔다. 내가 없을 땐 저보다 더 마음대로 집안을 활개 치고 다녔겠지. 


“할머니 지금 안 계시거든요.”


주인 허락 없이 함부로 물건을 만지지 말라는 의미로 나는 말을 툭 던졌다.


“아니~내가 저번에 준 마늘이 남았나 해서 그랴~”


큰할머니는 계속해서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양. 나는 그 모습에 속이 또다시 갑갑해져 왔다. 이런 모습 보기 싫어서 이곳을 떠났던 것을 잊고 있었다.


“할머니 보면 우리 쪽으로 오라구 혀. 응? 퇴비 만들어야 하거등?”


그렇게 큰할머니는 양손 가득 반찬들을 꺼내 들고는 서둘러 나갔다. 다시 홀로 남은 집안은 더욱 공허하게 느껴졌다. 바보. 바보 할매. 나는 덮개를 걷어내고 답답함을 퍽퍽한 보리밥과 함께 씹어 삼켰다. 


할머니는 8남매의 첫째였다. 그 시절이 으레 그랬듯. 일곱 명의 딸과 막내아들이 집안의 구성원이었고, 그중 가장 미움을 받음과 동시에 책임감을 져야 하는 포지션인 첫째 딸. 바로 그게 할머니였다. 그렇게 열여섯이랬나 열일곱이랬나. 막내 남동생을 위해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네 집안 며느리로 들어왔다. 어찌나 불행한 운명인지, 처가에서는 책임을 져야 하는 첫째임과 동시에 시가에서는 가장 힘없는 막내아들 며느리가 되었다. 


그뿐 만이랴. 아버지가 겨우 세 살, 당시 할머니 나이는 고작 스물. 결혼 3년 만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마 할머니가 입을 다물게 된 이유도 이러한 인생의 굴곡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손가락질을 못 본 척, 못 들은 척 버티는 것이야말로 할머니의 생존 방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생존 방식의 선택이 아주 현명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혈혈단신 자기편 하나 없던 할머니는 집안사람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군소리 않고 했기 때문이다. 큰할머니야말로 자신이 할 일을 모두 떠맡겨도 되는 사람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았으랴. 말로는 불쌍하다, 기구하다, 안쓰럽다며 할머니를 위하는 척 하지만, 그 말을 뱉는 입에는 항상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군소리 않고 모든 잡일을 맡아하는 할머니가 참 못마땅했다. 


그렇지만 여태껏 불만의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섣불리 할머니가 선택한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할머니의 인생 전체를 ‘틀렸다’고 부정하는 것만 같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도 똑같은 가해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패딩을 대충 걸쳐 입고 집 밖을 나섰다. 분명 한겨울인데도, 햇빛이 정통으로 머리에 꽂혔다. 높은 건물 없이 이런 햇살을 받아본 게 참 오랜만인 듯싶었다. 나는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큰할머니의 퇴비를 만들러 오라는 명령을 전하기 위해서 찾아 나선 건 분명히 아니다. 나는 어젯밤의 그 나무. 나무의 정체를 알기 위해 병원에 함께 가야만 했다. 


할머니가 어디에 있는지는 뻔할 뻔자였다. 보통 큰집 뒤에 있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큰집이 선심 썼다는 듯 할머니에게 내준 작고 허름한 비닐하우스는, 할머니만의 작업장이 되었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꽃도 키웠고, 가끔은 지나가던 비둘기도 잡아와서 키웠으며, 땔감 정리도 모두 그 안에서만 작업했다. 어릴 땐 내게 놀이터였지만, 이제는 녹이 슬어버린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풀냄새가 코를 찔렀다. 


꽤 많은 화분들과 작은 나무들을 살짝 밀치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왜 넓은 공간들은 이런 식물들에게 내주고 항상 구석에 앉아 일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쭈그리고 있는 할머니는 더욱 왜소해 보였다. 툭 튀어나온 등을 보자, 어젯밤에 느꼈던 그 이상한 것이 다시금 확 떠올랐다. 할머니는 내가 걸어 들어오는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바닥에 있는 낙엽들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할멈.”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거니 그제야 나를 올려다봤다.


“응 왔냐. 밥은.”


금방 다시 바닥의 낙엽들로 시선을 옮기며 할머니는 말을 뱉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손놀림. 건조한 낙엽들과 퇴비들을 살살 어루만지며 겨울 동안 밭에 쓸 연료를 만들고 있는 듯했다. 문득 아까 큰할머니가 전하고 갔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 


“큰할머니가 시킨 거야?”

“… 아녀. 이쯤되면 해야 하니 미리 하고 있었제.”


그 느릿한 말투에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왜 일을 찾아서 해?”


상당히 공격적인 말투에 놀랐는지, 할머니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다시 내게 시선을 줬다. 


“해야 하는 거니께. 아가. 하룻밤 잘 쉬었으면 어여 올라가.”

“안 가.”


퉁명스럽게 툭 말을 내뱉자, 할머니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안 가냐고 적극적으로 등을 떠밀었을 양반이, 지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상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사춘기에 걸린 것 같이 신경이 예민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낙엽을 만지기 시작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나는 기어코 낙엽 포대기를 반대쪽으로 끌어다 치웠다. 


“나랑 지금 당장 병원 가.” 

“어허. 왜 이려?”

“할 만큼 했잖아!! 이제 일 좀 그만 좀 하라니까!”


갑작스레 울분이 터져 나왔다. 감정을 조이는 나사가 툭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항상 똑같은 할머니의 태도. 이제는 그동안 할머니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아주 틀려 먹었더라고 내뱉고 싶었다. 그때였다.


“뭘 할 만큼 혀?”


언제 온 건지 큰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쿵 내려앉음과 동시에 나는 차라리 잘됐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 잘 오셨네요.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우리가 그쪽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어요?”

“민영아!”


참고 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브레이크가 쉽게 걸리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나를 말리는 건 참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였다. 


“아니 그렇잖아! 왜 할머니가 평생 종노릇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이 시꺼메졌다. 거칠고 두터운 손이 내 뺨을 내리쳤다.


“너… 너 그러는 거 아녀!!”


난생처음으로 듣는 할머니의 큰 소리였다. 억울했다. 내가 왜 뺨을 맞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때린 사람이 왜 할머니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눈물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때린 자신도 놀랐는지, 할머니는 이내 절뚝거리며 비닐하우스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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