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발을 들고 삼번이라도 사수하려던 내 계획은 선생님에게 들통 나버리면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앞으로 가” ‘제발 이번이라도…’ “앞으로 더 가”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듯 나는 일번을 차지해야 했다.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삼번을 만난 건, 학급 번호를 키 순서로 줄 세우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나는 일번 그녀는 삼번. 괜스레 기분이 나빴다. 150cm와 155cm. 그 사이는 다 거기서 거기인데, 내가 일번이 됐다는 사실이 조금 분했다. 그래서 삼번이 말하길, 나의 첫인상은 ‘새침’ 해 보였단다.
그렇게 우리는 키도 고만고만한 것들이 “내가 더 좀 더 크다”를 매일 같이 옥신각신하고, 155cm가 넘는 아이들이 ‘쪼그만 애들 끼리 다닌다’고 놀려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울려 다녔다. 때로는 “내가 너보다 좀 더 크다며”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등을 맞대고 서서 도토리 키재기를 하기도 했다. 얼마나 웃겼을까. 고만고만한 것들이 자기가 그럼에도 좀 더 크다고 도토리 키재기 하는 꼴이. 하여간 우리는 그때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토닥거리며 우정을 쌓아 올렸다.
키는 나와 삼번이 고만고만했지만, 삼번은 나와 다르게 꽤나 자유분방한 아이였다. 그러니까 공부를 안 했다는 이야기다. 삼번이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러하니 반 등수 같은 건 삼번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한 자유분방함이 때로는 한심스럽고 때로는 부러웠다. 그래도 우리는 친구였다.
여고 시절이 대개 그러하듯 우리는 남자선생님들에게 연정을 품기도 했다. 어쩐 일인지 우리는 둘 다 지리 선생님을 좋아했는데, 삼번은 젊은 지리 선생님인 ‘조지리’를 나는 마흔이 넘고 결혼도 해서 아이도 있는 ‘황선생님’을 연모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삼번도 지리 점수가 좋았던 건 아니었다. 연정이 점수로 이어지지 않았던 건 나와 삼번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친구인 이유였던 것 아닐까.
대학교에 가서도 삼번과 곧잘 어울렸다. 나와 삼번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다름 아닌 ‘술’이었다. 술 마시는 게 뭐라고, 뭔가 어른이라도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술을 마셨다. 내가 술에 취해 토하는 일은 부지기수였지만, 삼번은 역시나 나보다 앞서 술도 잘 마셨다. 삼번은 술 외에도 스무 살 넘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수많은 탐욕을 행했는데, 연애도 취직도 척척 해내었다. 그러니까 뭐든 앞선 일에는 삼번이 있었다. 결혼도 그리고 육아도.
나는 대학생 삼번은 직장인이던 때, 햄버거를 먹다 말고 삼번이 결혼을 한다며 조심스레 고백을 했다. 충격과 공포, 축하와 기쁨이 난무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와 어울리던 친구 중 제일 먼저 아주 빠르게 삼번이 결혼을 했다. 아마도 스물 하고도 네다섯쯤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하여간에 그랬다. 삼번은 뭔가 어른스러운 행보를 재빨리 걸었다.
삼번은 결혼을 하고 포천으로 이사를 갔다. 아이가 하나에서 둘이 되었고, 아기엄마에서 학부모가 되었다. 대전과 포천이라는 물리적 거리감이 생기고, 우리가 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감이 늘어났지만, 요즘은 몇 해 전보다 삼번과 연락하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역시 술 덕분이었는데, 가끔 홀로 취해 있을 때면 삼번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함께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기분을 누렸다. 친구란 물리적 거리감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삼번이 언젠가 학교에 레이지본의 1집 CD를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Do It Yourself’가 수록된 앨범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동방신기와 세븐과 UN을 좋아할 때였다. 그 CD를 삼번이 나에게 빌려주어 며칠 동안 레이지본의 1집을 들을 수 있었다. 넥스트와 스키조와 크라잉넛을 좋아하던 내 인디감성에, 어쩐지 어울리지 않던 펑크였다. 그래서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삼번에게 레이지본 CD를 돌려주었다. 하지만 가삿말이 멋지고 희망 찼던 Do It Your Self는 몇 번이고 되감기해 들었다.
꿈꾸며 사는 거야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니까 눈치 보며 살지마 떳떳하게 Do it Yourself 당당하게 사는 거야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니까 나의 길을 가겠어 나의 꿈은 소중하니까
우리가 어떤 어른이 될지 모르던 그 시절, 우리는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어른이 되기를 희망했을까. 너무나도 아득해진 먼 과거이지만, 아마도 그때 꾸었던 그 꿈을 우리 둘 다 실현하지는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 해 살아가고 있는 건, 나도 삼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의 그 시절을 충만하게 했던 건 미약하게나마 우리가 무엇이 될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 때문이지 않았을까. 마흔이 되고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어도 늘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명제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니까. 엄마이기 전, 내 친구이자 삼번 그 자체인 삼번도 늘 꿈을 꾸면 좋겠다. 그것이 작던 크던 자신으로 것만 가득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