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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하늘 보는 시간 Nov 19. 2024

밤하늘에 묻은 내 이야기

지금 나의 성격과 생각에는 사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한겨울에 따뜻한 외투를 껴입고 밤하늘을 바라보는 그 상상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특히, 겨울 밤하늘에 가장 오래 떠있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오리온자리를 좋아한다.


내 고향은 경남 창녕이라는 시골이다. 아버지는 소년가장이었다. 아버지가 여섯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고 한다. 공부도 곧잘 했지만 농사실을 해야 해서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했고, 그마저도 중퇴를 했다고 한다.


단칸방에 모여 살던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내가 기억도 안 나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붓글씨를 잘 쓰는 재주를 살려서, 간판을 제작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고, 식구 모두가 다시 고향인 창녕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생선장사, 문방구, 덤프트럭.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지만, 여전히 우리 집은 가난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50원을 주면서 엄마가 마가렛 과자를 하나 사 오라고 했다. 신난 나는 동네 골목길을 지나고 찻길을 지나서, 마가렛 한 개를 샀다. 낱개로 팔지는 않았는데, 내가 어린아이여서 꺼내주셨던 것 같다. 봉지 한 개에 든, 두 개의 과자를 동생과 내가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엄마는 왜 안 먹냐고 내가 물어보니 배불러서 안 먹는다고 했던 것 같다. 엄마의 얼굴과 가난이 자꾸만 겹쳐지는 그 장면이, 기억하면 할수록 가슴이 먹먹해져서 그런지, 나는 마가렛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새 아버지 직업은 또 바뀌어서 다시 간판일을 시작했고, 밤에는 사고 난 차량을 견인해 오는 레커일까지 했다. 직업이 2개가 된 아버지는 밤늦게 씻고 나면, 다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잠들었다. 사고 난 차량을 언제 견인하러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이 잦아졌고, 나는 더 소극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하고 겁쟁이가 되어 갔다. 13살이 되면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자동차 공장 뒤쪽에 있는 폐차장이었다. 폐차장에 아버지가 나무와 합판으로 천막집을 지었다. 겨울에는 온 가족이 전기장판 위에서 추위에 떨며 한 이불을 덮고 붙어서 잠을 잤다. 찌그러지고, 피 묻는 차만 모아놓은 폐차장에서 5년간 살았다.


나의 유일한 취미는 이천 원을 모으면 집 앞에 있는 동네서점에서 어린이 명랑소설을 사 와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행복한 이야기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집은 누군가가 사고가 나고 다쳐야만,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벌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면 주변은 깜깜하고 바람소리만 들렸다. 집에 화장실이 없어서 밤에는 플래시를 들고 정비공장의 화장실까지 가야 했다. 그 길 중간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쏟아질 듯이 빛나는 별들과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화려한 은하수가 있었다.


그토록 화려한 밤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어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비가 새는 천막집과 찌그러진 자동차 사이에, 덩그러니 서있는 내가 보였다. 지구, 태양, 은하, 우주, 너무 넓어서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 크기에 비해, 이 현실 속에 갇혀있는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중학생인 나는 당장 내일 있는 수련회를 가기 싫어서 핑곗거리를 찾는 보잘것없는 고민거리를 붙들고 있었다.


밤하늘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비해, 야속할 정도로 걱정 없고 평등한 세계였다. 밤을 새우며 그 갈등 속에서,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기도 했던 것 같다. 가난한 집, 고생하는 부모님, 답답하고 좁은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떠나서, 걱정 없이 우주와 별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


나의 열망 덕분인지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은 더 좋아졌지만, 더 큰 도시로 가기에 가진 것이 없던 나는, 한 학년에 두 반 밖에 되지 않는 가장 가까운 시골학교로 진학했다. 소위 SKY를 갈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어느 학교가 명문대인지도 몰랐던 나는, 그런 학교를 다니던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서울을 가본 적도 없었다. 나약해서 마음관리를 못해, 실전에 약한 나를 위해, 우리 집은 재수와 삼수를 지원해 주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을 하지는 못했고, 그냥 적당하게 점수에 맞추어서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에 갔다. 졸업을 하고 공군장교로 군복무를 하면서, 삶에서 더 현실적인 문제들과 씨름했다. '사'자가 붙거나, '고시'에 패스를 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성공인 줄 알았다. 기술고시/로스쿨/의학전문대학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방황하다 대기업에 합격했지만, 그런 거대한 곳에서 살아가는 미래를 생각하니 씁쓸함이 더 밀려왔다.


왜 대기업에 가지 않느냐는 동기들과 선배들의 말을 뒤로 한채, 결국, 좀 더 작은 회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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