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기자질 5년 3개월이 됐다. 내가 여태 취재를 하며 쌓아왔던 인간관계와 내 멘탈은 참 많이 무너지고 무뎌졌다. 그중에서도 혐오스러웠던 세 가지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세 가지를 분류시키며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 듯이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기도 하다. 우선 '삼성'이다.
기자를 처음 했을 때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이미지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수습이 끝나고 2016년 7월 21일 이건희 성매매 사건이 터졌다.
당시 뉴스타파는 이 회장으로 보이는 듯한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들에게 돈을 주는 모습, 성관계를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동영상은 2011년 12월부터 2013년 6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과 논현동 빌라에서 촬영됐다고 보도했다.
지난 2011년 12월 찍혔다는 영상에는 이 회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여성들에게 돈을 건넨다. 남성은 여성에게 “네가 오늘 수고했어. 네 키스 때문에 오늘 ○○했어”라고 말하는 음성이 들린다.
또 2012년 3월에 촬영됐다는 영상에선 “감기 때문에? 감기하고 ○○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라고 말한다.
나에겐 매우 충격적이었다. 대한민국 재계 역사를 공부하며 '그들만의 리그'가 있다는 현실을 믿기가 싫었고 다가오지 않았다.
해당 보도는 내 뇌리에 '대기업은 쓰레기다'라는 매우 편향적인 인식을 심어주었고 재계 취재를 할 때에 열정적으로 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됐다.
시간이 흘러 2018년 검찰 마와리를 돌며 한 문건을 확보했다.
이른바 '노조 파괴 문건' 또는 노조 와해 문건으로 불리는 삼성그룹 계열사 삼성SDI의 내부 문건이었다. 제보자는 해당 문건이 사라진 미래전략실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건에는 '부산 NJ 설립 움직임 상황', ‘부산사업장 SM 인력현황’, '사업장 전체 MJ 인물 현황', '퇴직자 문제 인력 사진', '모임 관련 동향', ‘사내, 외 유인물 관련자 조사활동 결과보고’ 등의 제목으로 분류돼 있었다.
노조 설립 활동과 관련해 관심 사원을 'KS', 문제인물을 'MJ', 노동조합을 'NJ', 희망퇴직을'HT'로 약칭했다. 특히 희망퇴직 시 문제인력을 해소할 수 있는지 여부를 표로 정리해 구분하기도 했다.
관심 사원들 중엔 '전향 불가' 인물과 '전향 가능' 인물을 나눠 조직적으로 관리하기도 했다. 삼성이 노조를 만들려 한 직원들을 미행한 정황도 포착됐다. 2007년 작성된 '6/23(토) 모임 관련 상황 일지'라는 제목의 문건을 보면, 한 음식점에서 열린 직원 모임의 참석 명단은 물론 시간대별 상황, 참석자들의 승용차 차량 번호까지 기재됐다. 같은 해 작성된 ‘7/26(목) 모임 관련 상황 일지’에는 참석자들이 어떤 식당을 들렸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 적혀있다.
2001년 12월 20일 작성된 '사내외 유인물 관련자 조사활동 결과보고'라는 문건엔 희망퇴직 및 노조 설립과 관련한 유인물을 뿌린 직원들의 명단과 가족관계, 최종 학력, 부채 및 대인관계 등 사생활까지 구체적으로 담겼다.
삼성은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격리조'와 '설득조'로 나눠 비상연락망을 공유했다. '유인물 핵심 인력 격리 시 단계별 행동요령'이라는 지침을 통해 구체적으로 대응 방법을 명시하기도 했다.
이 문건의 ‘유인물 핵심인력 격리 시 단계별 ’ 행동 요령'엔 △사외에서 면담을 하자며 책임자 외 간부 1명과 동행하여 사외 이동 △책임간부 차량이 미팅 장소에 도착 시 대기하던 격리 조 2명 강제 탑승 동행 △격리조 책임간부 차량 동승 시 핵심 인물 뒷좌석 중앙에 위치, 본인 양쪽 탑승 △이동 중 핵심인물 통신 수단 철저한 차단 및 강한 관리 할 것 △가급적 이동 중 휴게실 휴식은 자제할 것 등의 내용이 적혀있다.
문건의 '핵심 인물 면담 시 면담 요령‘ 항목에는 △면담 전 핵심인물에게 부서장으로서 사외에서 면답을 하는 것이라고 할 것 △인물 관련하여 자신이 행동한 부분, 정보 내용에 대해 모두 실토 유도 △격리조는 최대한 인근 포스트에 대기하면서 분위기를 살피고 24HR 감시할 것 △면담 과정에서 스스로 도움을 준다면 H/T금 지급 약속, 그렇지 않을 시 해고 등의 내용이 담겼다.
’책임부서장 면담 시 반드시 알아내야 할 과제‘라는 항목에는 △유인물 관련 외부 연계된 인물 및 교육을 받은 사실 추궁 후 확보 △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 고발을 하겠다고 강조하면서 압박수단 활용 등의 내용이 담겼다.
기타 사항에는 △격리 조별 활동비를 사전 지급할 것 △각 조별 무전기 2대를 지급할 것 △녹음기를 사전 2대 확보하여 지급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삼성그룹과 SDI 측에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공식입장 조차 내지 않았다.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태를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고 대응하는 자세가 토가 나올 정도로 역겨웠다.
삼성 미래전략실 출신 한 간부와 식사를 했을 때 첫마디가 이랬다.
"기자님 그런 기사 왜 쓰세요? 별로 좋은 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서 욕을 박고 싸우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흥분하고 감정적인 인간으로 기자 생활을 한다면 타인과의 싸움에서 항상 질 수밖에 없다. 어렸지만 참는 법을 배웠기에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수차례 도발이 있었지만 그냥 참았다.
같은 말을 하지만 기자는 행동이라는 취재가 아닌 팩트로 무장한 기사로 말해야 한다. 술자리에서 즐기는 '안주 거리'로 "누가 그랬다고 하던데"라며 겸손하지 못하고 사실관계 확인이 되지 않은 것들을 읊어된다면 그것은 기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난 아마 수십 차례는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뭐라도 된 듯이 우쭐대며 관심받고 싶어 하는 종자처럼 말이다. 지금도 변함없다. 그러나 수많은 뉘우침과 '이불킥'으로 선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자중하려 애쓰고 있다.
큰 곳과 큰 것을 상대하려면 자기 자신이 무거워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전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는 되지 않더라도 작은 쇳덩어리로 바위를 치면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