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에 색깔이 어디 있나........
브런치도 10개월 만이다. 순탄할 줄 알았던 2024년도 어김없이 태풍이 휘몰아쳤다. 30살이란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갔다가 두 달 만에 전역하게 됐다. 사유는 비장 낭종 때문이다. 이른바 장기에 기생충이 박혀 있는 질병이다. 기생충이 점점 커져 알을 까면 그만큼 적출해야 하는 장기가 늘어나는 위험한 상태였다. ‘돌연사’ 가능성이 큰 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이 병에 걸린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애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내 몸에 있던 기생충이 발견되지 않은 지가 30년이 넘었단다. 수술을 집도하셨던 교수님은 “중남미나 아프리카에 가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는 케이스다. 이건 학회에 보고해야 한다”고 하셨다. 생전 아프리카나 중남미를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기생충의 크기가 너무 컸던 지라 복강경으로 모자랐다. 결국 전신마취 후 배를 10cm가량 갈라서 기생충을 직접 제거했다. 나름 큰 수술이었다. 수술 이후 3주가 넘도록 휠체어를 타며 재활치료를 받았다. 덕분에 살도 12kg 정도 뺄 수 있었다. 문제는 귀찮지만 죽을 때까지 5년에 한 번씩은 척추에 면역력 백신을 맞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참 특이하고도 웃픈 인생이다.
글발이 죽진 않았을까? 다시 책을 읽고 글쓰기도 연습하며 지난 8월 회사로 복귀했다. 그렇게 준비 중이던 ‘기획 취재’를 이어갔다. 지난해부터 이번 달까지 총 일본을 네 번 방문했다. 첫 방문은 단순 여행이었다. 그러나 직업병 때문인지 점점 아이템을 찾는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주로 취재했던 마약 문제부터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조총련)의 현재 상황을 들여다봤다. 언론에 가장 많이 언급됐던 건 역시 ‘조선학교 차별’ 문제였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일본 사회에서 혐오의 시선 경험하며 살아간다. 대부분 민족 역사와 한국말을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기에 조선학교를 다니는 것이지 북한 정권에 충성하거나 주체사상을 피부로 느끼려는 학생은 거의 없다.
조선학교는 1945년 해방 후 한국에 돌아가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아이들에게 한민족의 정체성과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 벌인 민족 교육 운동의 결과다. 북한은 1950년대부터 조선학교에 장학금과 교과서 등을 보내며 지원한 반면 한국 정부는 외면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학교는 북한 체제를 옹호하는 교육도 하게 됐다. 현재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일본 내 한국 학교의 수는 도쿄 1곳 등 겨우 4곳으로, 조선학교(60여 곳)와 격차가 크다.
조선학교와 조총련은 재정난에 시달릴 만큼 과거와는 다르게 위상이 하락했다. 영향력도 줄어들어 조선학교는 물론 조총련 구성원조차도 70% 정도는 한국 국적자다. 지난 1965년 한·일 국교 수립 이후 일본에 거주하는 교포들의 생활환경은 분열됐다. 먼저, 일본 당국은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있는 이들을 1947년 미군정 당시 편의상 만든 임시 국적인 조선적으로 분류했다. 현재 재일교포 중 대한민국 국적자는 41만여명이다. 조선적은 국제법상 무국적자로, 본인 의지만 있다면 한국이나 일본 등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지난 2018년 12월 기준 조선적은 2만9559명이었으나 현재는 약 2만2000명 정도다.
조총련의 재정난은 곧 조선학교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졌다. 학생 수가 줄고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한다. 얼어붙은 남북관계는 학생들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국내 시민단체의 지원과 접촉이 끊겨 ‘불법’에 손대는 학생들까지 생기게 됐다. 일부 학생들은 성매매업에 종사하거나 마약 유통책이 된다. 이 비극의 대물림은 다른 유형의 ‘헤이트 스피치’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약 한 달여 전 만났던 조선학교 학생은 “조선적이나 재일동포라고 하면 혐오 대상이 된다. 합법보다는 불법이 더 돈이 된다”고 했다. 이들을 범죄에 소굴에서 벗어나게끔 도와주는 손길이 적다는 게 부가적인 문제다. 국내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지난해 말처럼 접촉이 됐다면 지원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남북교류협력법 제30조(국외단체 중 북한 주민 간주 조항)에 따르면 조총련 간부와 관계자는 북한 주민으로 취급된다. 조선학교 교장을 포함해 조총련 산하기관에 근무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대한민국 국적자다. 현행법상 북한 주민으로 취급되는데 대한민국 국적자라는 게 충돌 지점이다.
통일부 신고 절차를 밟지 않고 북한 주민으로 취급되는 대한민국 국적자를 만나면 남북교류협력법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혐의까지 받을 수 있다. 당연히 신고 절차는 밟아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적자를 만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의 칼끝에 서지 않기 위한 절차상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현실이 씁쓸하다.
통일부는 조총련 및 북한의 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국외단체의 구성원을 북한 주민으로 본다고 규정했다. 다만 국적 여부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애매하면서도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이는 만난 대상이 북한의 노선에 따라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냐 아니냐에 따라 법 위반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조선학교 학생 모두가 북한 공작원과 접촉하거나 조총련의 지령을 받는 것도 아니다, 설사 몇몇 시민단체 지원이 있다고 해도 재정난을 겪는 상황에서 이행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이젠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다. 지난해 말부터 통일부에 신고해도 수리해 주는 경우가 거의 없어진 게 원인이다. 사실상 절차가 아닌 허가제로 바뀐 꼴이다.
정치적 사상과 이념에 따라 약자에 대한 배려 가능성이 달라졌다. 한 인간을 돕고자 하는 행위도 순수와 진정성이 아닌 이익 여부에 따른 선택으로 오염됐다. 모두의 의무가 아니지만 최소한의 선의조차 행하지 않으려는 세상의 너머는 어떨까? 잘 모르겠지만 그땐 모두가 책임지기에는 늦어버린 세상일 거다. 전조가 시작됐음을 알면서도 대부분은 분노하지 않는다. 그게 달콤하고 편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