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어릴 적 TV에서 ‘말괄량이 삐삐’가 방영되었다. 주근깨투성이의 겁 없는 삐삐가 먹음직스러운 커다란 케이크를 악당들에게 던지는 장면이 기억난다. 집 안은 엉망이 되고 얼굴을 덮은 하얀 크림은 옷으로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이 씩씩한 소녀 주변엔 늘 재미있는 일들이 우당탕 벌어지고 있었다.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게 일곱 살 딸 카린이 있었다. 홍역에 걸려 며칠 째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던 카린은 엄마에게 ‘삐삐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아스트리드는 딸이 지어낸 삐삐라는 이름에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었다. 그 후로 3년이 지나 눈길에 미끄러져 발목을 다친 아스트리드는 병상에 누워 꼼짝없이 4주를 보내게 된다. 무료함을 달래던 어느 날, 딸의 열 살 생일에 삐삐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선물할 계획으로 글을 쓴다.
훗날 이 원고는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한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어른 없이 자유롭게 혼자 사는 여자아이의 이야기가 순조롭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권위와 도덕적 훈계를 일삼는 교육자들과 부모들의 비판이 길게 이어졌으나, 어린이들에게 삐삐는 자유와 해방감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린드그랜 탄생 110주기를 넘기도록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작품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1945」 탄생 배경이다.
아스트리드가 본인 생애 중 침묵하고 싶었던 짧은 시기가 있다. 그의 딸 카린에게는 여덟살 많은 오빠가 있었다. 국내에 2021년 개봉된 영화 『비커밍 아스트리드』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까지 아스트리드 삶을 조명했다. 지나친 각색도, 그 어떤 미화도 없이 전기를 충실히 다룬 영화다.
1923년 중등학교를 마친 열여섯의 아스트리드로 거슬러 가본다. 그는 빔메르뷔라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서 소작농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돕던 아스트리드는 아버지 영향 아래 신문사 수습기자의 자리를 제안받는다. 당시 남성의 영역이었던 언론사에 여성으로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기회였다. 신문사 편집장이자 소유주였던 레인홀드 블룸베리는 여섯 자녀가 있었고 재혼을 한 유부남이었다. 열정을 다해 일을 사랑했던 열아홉의 아스트리드는 30년 연상인 이 중년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다.
1926년 봄, 더 이상 임신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자 마을을 떠나 출산하기로 결심한다. 이로서 아스트리드의 가장 행복한 유년시절은 끝이 난다.
타 도시에서 어렵게 출산을 한 후에도 아기는 3년 동안 위탁모에게 맡겨져야만 했다. 전 부인과 이혼 소송 중이었던 편집장과는 이별을 택하고 미혼모가 된다. 20여 년이 지나 늙어가는 레인홀드에게 쓴 편지에는 “그때 난 피임법에 대해 전혀 몰랐어. 그러니까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지독하게 무책임한 짓을 했는지 몰랐지”라고 분노에 찬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20년대 뒤쳐진 스웨덴 성 정책은 피임기구 판매는 허용된 반면 콘돔이나 여성용 피임기구에 대한 광고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당시 성에 대해 무지했던 많은 소녀들은 그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스트리드는 당장 출산할 곳을 알아봐야 했다. 혼외 출산하는 여성들을 받아줬던 사립 조산원은 태어난 아기들을 돌보는데 관심이 없었다. 돈벌이 수단으로 인신매매를 연결하거나 대부분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양심 없는 위탁모들도 많았다. 그중 한 곳인 조산원에 들어갈 뻔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스웨덴 최초 여성 변호사인 에바 안덴을 만나게 된다. 1926년 여성 미혼모들을 돕는 활동을 하던 그는 만삭의 아스트리드를 비상시 의료나 법률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상담소에 데려간다. 페미니스트 잡지의 편집장이자 의사인 아다 닐손과 함께 이 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말년의 아스트리드는 그때 그 여성들로부터 도움과 조언을 받은 것은 비길 데 없는 행운이었다고 회상했다. 열아홉의 그는 부모이름 없이 익명으로 출산이 가능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들 라세를 낳게 된다. 에바 안덴은 예비 엄마의 출산 전후를 도와주는 위탁모 한 분을 아스트리드에게 소개한다.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아스트리드는 갓 태어난 아들 라세를 품으로 데려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 스톡홀름에서 아이가 있는 코펜하겐까지 기차 왕복표를 벌어 서너 달에 한 번 씩 위탁모 마리 스테벤스의 집에 찾아간다. 어린 엄마가 되어 어둡고 긴 터널 같은 시간을 혼자 견뎌낸 시기였다.
위탁모인 마리에 대해서는 훗 날 편지글로 ‘평생 만난 여성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었다고 전한다. 굽이진 길목 끝에서 이 여성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성의 권리, 특히 몸과 자기 결정권에 대한 투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까지 여전히 이어져 왔다. 사회 구조적 소용돌이 속에 속절없이 내던져진 소녀들. 법과 출산과 돌봄의 사각지대에서 그들이 손을 내밀었다. 여성이 여성을 돕는다. 사람은 연결되어야만 하고, 다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 삶이 나아간다.
엄마 아스트리드는 라세 곁에서 깊은 애정과 죄책감 사이를 오가며 지냈다. 어린이 문학에 담긴 그의 많은 작품들에는 작고 여린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인물마다 서려있다. 그는 평생 글과 목소리로 세상과 연결 짓는 삶을 살았다.
<참고자료>
-영화-
「비커밍 아스트리드」2021
-도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여유당 2012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창비 2020
김정희 (읽고 쓰고 그리는 사람)
엄마가 된 예술가들의 생애를 찾아 글을 씁니다.
가사와 육아와 꿈과 일 사이에서 분투하는 여성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