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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Sep 30. 2024

청국장 찾아온 날

마음 살피기

가을이다. 계절의 변화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건 서늘해진 기운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주부터 청국장이 먹고 싶어졌다. 맹위를 떨치는 더위 앞에서는 한 번도 떠오르지 않던 음식이었다.     


바깥 차가운 공기를 온몸에 감고 집안에 들어서는 날 쿰쿰한 냄새와 함께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청국장찌개는 다른 찬이 필요 없다. 밥과 그것만 있어도 불만이 없을 만큼이다. 채소와 두부가 숟가락 가득 담긴 채로 입안에 들어가고 나면 서서히 따뜻한 기운이 흐른다.     


소박한 한 그릇에서 나오는 포근함은 내 어깨를 부드러운 손길로 토닥여주는 기분이다. 밥을 먹고 나서도 이런 느낌은 오래 기억된다. 청국장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별로라 여겼던 내가 서늘할 무렵이면 찾게 되는 이유다.     


청국장을 알게 된 건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서다. 여러 장면 중에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청국장을 끓이는 날이면 어린 손자나 가족들이 난리다. 마음에 들지 않는 냄새를 거론하며 툴툴대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서 맛보기 전까진 쉽게 먹기 힘든 음식이라 여겼다.     

어른이 될 때까지 청국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고향 제주는 사계절 따뜻해서 겨울에도 밭에만 나가면 초록 채소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재료의 맛을 살리는 최소한의 조리법으로 만드는 요리가 주를 이뤘다.      


그런 음식에 익숙해진 내가 어른이 되고 집을 떠나 살면서 조금씩 변했다. 사는 공간의 변화와 내가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내게 영향을 미친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면서 성당을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서 알게 된 이들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많았다. 가끔 집에서 만날 일이 있었는데 음식솜씨 좋은 이가 청국장을 끓여 내었다. 내가 생각했던 맛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었다. 된장국보다는 강한 냄새가 나지만 시간을 둘수록 부드럽게 이어지는 뒷맛이 매력적이었다.    

 

하늘은 잔뜩 흐리고 바로 눈이 날려도 이상하지 않은 초겨울 날이었다. 기도하고 짧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둥근 밥상에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중심에는 뚝배기에 담긴 청국장이 있다. 특별히 많은 재료를 넣은 것도 아니다. 일 년이 다되어가는 묵은지와 무를 넣고 두부를 도톰하게 썰어 넣었을 뿐이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아도 자연스러우면서도 묵직한 무게감과 동시에 고소함은 강렬했다.   

   

그때부터 청국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남편과 나를 위한 음식이다. 동네 로컬푸드 매장에서 둥글고 납작한 작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청국장을 사 오면 2주 남짓을 먹는다. 이것만을 이용하면 그보다 훨씬 빨리 먹겠지만 내 스타일로 재해석한 청국장을 즐겨서 가능하다.    

 

집에 있는 호박과 묵은지 무 등 있는 채소를 끓고 있는 멸치 육수에 넣고 익어갈 무렵 청국장과 엄마표 집 된장을 조금 더한다. 그러면 과하지 않은 청국장 향이 살짝 도는 가벼운 찌개 완성이다. 별다른 재료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이 없다. 여름을 보내고 모두가 더위에서 벗어날 무렵부터 청국장을 끓였다.  

   

2주 동안 대략 대 여섯 번은 끓인 것 같다. 오래된 뚝배기에 찌개가 끓는 소리가 들릴 때 살짝 뚜껑을 열어보면 청국장이 국물에 서서히 퍼져나가 채소와 조화를 이룬다. 서로에게 스며들어 제맛을 내는 과정을 혼자 흐뭇하게 바라본다.     


아직은 여름 기운이 남아있지만 내 몸은 이미 가을을 알아차렸다. 발에 살짝 찬 기운이 도는 것부터 시작이다. 걱정을 내려놓고 살아야겠다고 하지만 언젠지도 모르게 내 옆으로 바싹 다가온다. 이런 날이면 청국장을 먹으며 가벼워지려 한다.     


뜨거운 것을 먹으면 순간 몸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이마와 얼굴이 축축하다. 이 정도의 열기는 답답한 속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여유는 덤이다. 그래서 이것이 먹고 싶은 날은 내 마음을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날은 무엇이든 조금의 힘듦이 찾아왔다는 증거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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