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었던 맛을 불러오다
과수원 방풍나무인 측백이 몹시도 흔들리던 추운 날이었다. 그날 저녁에 밥상에 오른 무 조각을 쌈장에 찍어 먹었다. 처음에는 먹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권유에 마지못해 무를 하나 들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그 여운이 오래 남았다. 그렇게 삶은 무를 먹은 날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그 후로 이것을 그리 잘 먹었던 기억은 없다. 다른 식구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 역시 무를 그렇게 먹는 법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학교 텃밭에서 키운 총각무 3개를 작은 비닐에 담고 왔다. 같은 반 20여 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고루 나누었나 보다. 아이는 이것으로 무슨 음식을 할 거냐고 물었다. 워낙 양이 적다 보니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다.
하룻밤을 자고 문득 어릴 적 먹었던 무가 떠올랐다. 무가 중심인 요리는 깍두기나 나물 전, 생채 등이었다. 삶은 무를 쌈장에 찍어 먹는 건 그동안 없었다. 물컹한 삶은 무를 경험했던 계절은 지금처럼 겨울이었다.
황토 묻은 무를 씻어낸 후에 끓는 물에 넣고 충분히 익을 동안 삶았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맛이 궁금했다. 젓가락으로 콕 찔러보니 쑥 잘 들어간다. 그러면 잘 익었다는 증거다. 그릇에 넣고 잠시 식힌 다음 점심상에 올렸다.
남편과 함께다. 무를 가리키며 한번 먹으라고 권하자 맛을 본다. 그 후로 몇 개를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나 혼자서 신나게 먹었다. 복잡한 고민은 저만치 사라지고 그냥 먹을 뿐이고, 기분이 좋다.
기억 속 맛이 덧입혀져 무를 먹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를 돌아보면 참 열심히 살았다. 부모님을 중심으로 우리 가족이 그랬다. 평일에는 부모님은 과수원으로 우리는 학교로 향했다. 주말에는 다시 과수원으로 갔다. 물론 귤 따기가 한창이던 늦가을이 절정에 달했지만 다른 계절에도 종종 부모님을 도왔다.
농부에겐 평일과 휴일이 따로 없다. 가족 모두가 쉼 없이 살았던 날들이었다. 그때 엄마가 밥상에 올렸던 무는 어려운 살림에 반찬 가짓수를 더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어릴 적 먹었던 음식에 대한 추억이 떠오를 때면 나를 이루는 근간을 돌아본다.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면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들과의 추억이다.
과거가 애틋할수록 현재가 힘들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내가 자꾸 까마득한 날들을 소환하면서 내가 만난 음식과 함께 얘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별과 예상에 없던 일을 겪으면서는 좋은 시절은 지금이라고, 힘을 내어보자고 다독이기도 했다. 어떤 힘듦이 내 앞에 닥쳤을 때야 습관처럼 뒤를 돌아본다. 무를 먹다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물며 내 삶을 살폈다.
밥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고 동시에 배운다. 오랫동안 기억 남는 음식을 어느 날 갑작스럽게 만나는 일은 드물다. 희로애락의 삶 어느 한 장면에서 마주하고 된다. 다시 찾는다는 건 그것을 먹었던 날의 분위기와 기분, 맛, 함께했던 사람들이 어울려 강한 인상을 주었기에 가능하다.
기억이라는 건 쌓여있지만 그것을 꺼내어 보는 일은 촉진제가 있지 않으면 묻혀 버린다. 아이가 더운 여름날 점심시간이면 물을 주면서 키워낸 총각무를 수확했다. 그것을 통해서 사라졌던 어린 날 내 삶의 작은 공간에 들어가서 행복했다.
무맛을 이제야 깊이 알아간다. 하루 중에서 좋은 시간을 돌아보면 아주 잠깐이다. 그냥 무맛으로 덤덤히 살아가는 일상이 견고한 삶을 만든다. 무맛은 아무 맛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르는 깊음이 있다. 무를 통해서도 내 일상이 과거와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저절로, 자연스럽다고 하는 생활의 모든 것들이 어느 사이엔가 관계를 맺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