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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16. 2024

겨울 배추 그리고 배춧국

따뜻한 식탁 

겨울 배추 맛을 알아가는 중이다. 일요일 점심에 배추 가득 넣은 쇠고기 전골을 끓였다. 처음에는 샤부샤부를 생각하지만 결국은 전골로 끝냈다. 새송이와 팽이버섯, 배추와 청경채, 고기까지 준비를 해두고는 편하게 먹을 수 있게 한 번에 끓여내었다.      


이 중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건 배추다. 쌈 배추라고 적힌 걸 하나 사 왔는데 속은 꽉 차 있고 크기는 적당하다. 겉면은 살짝 초록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밝은 노란색을 띤다. 뻣뻣한 대도 일반 배추와는 달리 여리다.     

배추는 끓는 육수에 넣어서 보글보글 끓여도 본디 색을 잃지 않는다. 단단한 대를 먼저 넣고 그 뒤로 잎이 들어간다. 청경채와 고기가 들어가고 마지막이 버섯들이다. 각자의 접시에 떠서 소스에 살짝 찍어 먹는다.     


배추가 부드러우면서 달큼하다. 밴댕이 포와 다시마를 넣은 육수에 멸치액젓으로 간했다. 배추 속으로 그것이 들어갔는지 맛이 깊다. 겨울날 배추는 다른 때보다 더 정이 간다. 겉면은 진한 초록으로 어떤 겨울바람도 헤쳐나갈 것 같은 단단함이 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부드럽다. 겨울배추는 내유외강이다.  

 

속 배춧잎 하나를 들어 쌈장에 찍으면 사라졌던 입맛이 어느새 돌아와 밥통에 있는 따뜻한 밥을 찾게 된다. 배추가 장바구니 속으로 자주 들어가는 때가 이 계절이다. 이번처럼 쌈용으로 나온 적당한 크기도 준비하지만 때로는 김장용 배추도 한두 포기 사둔다.     

배추된장국과 전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국물이 제격인 추운 겨울 저녁에는 이것이 최고의 재료다. 배추를 살짝 데치거나 그대로 된장국을 끓이면 얼었던 속이 풀린다. 


어딘가에 마음을 두고 싶을 때 몇 번이나 봤던 김태리 주연의《리틀 포레스트》에서도 배추가 등장한다. 흰 눈 쌓인 꽁꽁 언 땅에서도 숨 쉬던  그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는 빈집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텃밭으로 나가 배추를 뽑았고, 된장국을 끓여 허기를 달랬다. 차가운 집에 온기를 불어넣은 그 요리는 부재한 엄마의 품이었고, 집으로 잘 돌아왔다는 환영의 한 그릇이었다.     


내게도 요즘 들어 배추가 살짝 그런 대상이 되어간다. 단출하고 익숙하지만, 매번 푹 익은 보글보글 끓는 배춧국 한 그릇은 다른 것이 필요 없을 만큼 넉넉함으로 품어준다. 어릴 적 이것과 함께는 김치였는데 이젠 그것이 없어도 허전하지 않다.     


초등생 무렵 단골로 밥상에 올라오는 게 배추 된장국이었다. 물론 그때의 배추는 속보다는 푸른 잎이 더 많았지만, 간혹 드문드문 노란 속도 들어있었다. 엄마는 멸치를 넣고 끓이거나 때로는 그냥 된장만 풀었다.


그때는 그것을 반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침에 끓여놓은 배춧국을 점심이나 저녁때 데워서 먹으면 진한 맛이 더해져 제법 밥 동무가 되었다. 국에 밥을 말면 특유의 된장 향과 짭조름함을 달래주던 배추가 어우러져 예상에 없던 즐거움이 찾아왔다. 그것으로 추운 날 별로였던 기분을 잠시 내려놓았다.     


이제는 부엌에서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방향으로 배추를 다룬다. 묵직하고 오래 먹을 수 있는 배추 한 포기를 다양하게 요리하면서 그 쓰임의 폭이 얼마나 넓은 지도 알아간다. 된장국은 기본이며, 얼큰 스타일로 여러 고기와도 잘 어울린다.  가끔 전을 부치면 고소함이 배가 된다. 나물은 담백해서 자꾸 손이 간다. 


쇠고기가 들어간 배춧국도 훌륭하다. 저녁에 집에 있는 국거리용 고기로 배추를 넣고 끓였다. 아침에는 겨울임에도 꽤 포근한 날이었는데 오후에 접어들면서 점차 기온이 내려간다. 이미 내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으로 바깥공기의 변화를 감지한다.     


월요일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가족들을 위해 준비했다. 밥은 곧 집이 아닐까 한다. 편안함이 은은히 흐르고, 기대하거나 기댈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는 곳. 현실은 정반대 일지라도 집은 그러해야 한다고 여긴다.  


추운 날 국 한 그릇은 “아 살 것 같다”라는 작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배추가 몸의 독소를 배출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하니 여러모로 일거양득이다. 


매일 밥을 하고 식탁을 차린다. 그러다 내 음식에 도움을 주는 것들의 제 모습을 보게 될 때면 참 기분이 좋다. 그건 나만의 사유의 시간이 찾아왔다는 증거이고, 지금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다.   


멀리 있는 것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를 것들로 일상을 채우려 하면 힘이 든다. 그런 것 대부분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이다. 지나간 것과 오지 않을 것들에 힘을 쓰기보다 한 끼의 식탁을 채워주는 고마운 것들을 바라본다. 겨울 배추도 그랬다. 스스로 위로하는 법, 지금 내겐 배춧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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