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재석 Dec 09. 2022

기적은 때때로 타이밍이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때때로 우연한 타이밍에 기분 좋은 일들이 생길 때가 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넘길 때가 대부분이지만 어떤 우연은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 따뜻함이 있다. 그 일이 어떤 특별한 나의 체험과 연결돼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최근에 코로나에 걸려 5일간 격리생활을 했다. 4차에 걸친 백신 접종에도 불구하고 확진됐다. 다행히 큰 고통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복귀해서 일상적인 업무를 보기에는 조금 제약이 있었다. 마스크 착용은 물론이고, 면역력이 저하된 환자들은 직접 접촉을 피해야 했다. 여전히 내 안에 바이러스가 살아 있기 때문이란다. 이런 의학적, 물리적 제약에도 피할 수 없는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 다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선한 동기와 열정을 다시 기억할 수 있었다. 


각설하고 이 소중한 만남은 지난 12월 7일 오후에 일어났다. 나는 시간 단위로 돈을 받는 병원 목사다. 점심시간은 30분. 이날은 점심을 먹고 다시 일하러 가야 할 시각이, 1시 14분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격리 뒤 복귀한 지 이틀째인지라 좀 더 쉬다가 가려고 미적거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어린이 병동 간호사로부터 방문 요청이 들어왔다. 


‘우리 주님 내 쉬는 꼴을 못 보시는구나’  정확하게 1시 14분에 울린 전화벨이었기 때문이다. ㅎㅎ 


사무실을 나와 6개월 된 아기 환자를 둔 가족을 방문했다. 지난달부터 어린이병동은  환자로 북새통이다. 호흡기 바이러스로 인해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이들은 대학병원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마을에게 온 사람들인데 병원 채플린이 자신의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했다.  


요청을 받고 방에 들어갔을 때 아기는 침대에 누워 있다. 젊은 부모는 침대 곁에서 6개월 된 딸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기는 코에 꽂힌 산소공급 호스가 불편한지 계속 손으로 코를 만지고 있다. 엄마는 호스가 빠지지 않도록 아기 손을 제지하고 있다. 아기의 눈은 촉촉하게 젖었고, 공갈젖꼭지를 빨며 입을 오물거린다. 이름을 불러도 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낯선 목소리에 노란 가운에 마스크, 비닐장갑을 낀 내 모습이 아기 눈에 이상하게 느꼈을 것이다. 내 엄지 손가락으로 아기의 손바닥을 건드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조금씩 내게 눈길을 준다. 엄마 한번 나 한번… 결국 나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엄마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다행히, 아기의 부모들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내 모습이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몇 분 아기와 교감을 나눈 뒤 부모에게 어떤 것을 도와 드릴지 물었다. 아기 아빠가 기도를 청했다. 그래서, 아기와 부모를 위해 간단히 기도했다.  기도를 하면서 내 손가락을 아기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런데, 기도 중에 아기가 내 손가락을 꽉 붙잡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 눈을 떴다. 아기가 정말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내 검지 손가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 내 손가락을 통해 전해지는 압력과 온기… 이 특별한 압력과 온기는 어디선가 내가 경험한 것이었다.  


지난 2019년  11월 말, 언덕길 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할 때 그 길을 내려가던 한 미국 청년이 나를 도와주기 위해 내 차로 다가왔다. 그런데 하필 그때,  길 위쪽에서 흰색 승합차 한대가  미끄러져 내려왔다. 마치 얼음판에  썰매가 미끄러지듯 내 차 쪽으로 순식간에 내려왔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내차 조수석 쪽에 서 있던 청년에게 피하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정말 큰 사고를 당해 죽게 됐구나 했던 순간, 그 차는 간발의 차이로 내 차를 피해 길가 도랑을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나에게 그 청년은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주었다. 그 청년이 괜찮으냐고 해서 내가 손을 한 번 잡아 달라고 했다. 그러면 정신이 좀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꺼이 장갑을 벗고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 압력과 온기는 죽음의 공포에 빠졌던 나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손의 전해진 압력과 온기를 나는  6개월 된 아기로부터 오롯이 다시 체험한 것이다. 왜 일까?  


기도를 마치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잠시 누르고 그 아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의 아멘 소리에 놀랐는지 아기가 마치 박수라도 치듯이 두 손을 부딪히며 까르르까르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이의 부모님과 나도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미국 병원 목사생활 6년, 특히, 코로나 중환실에서 2년 거치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지금도 코로나로 죽어간 많은 분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함께 나눌 수 있었을까? 나와 내 가족은 다 괜찮은데 내가 과연 그분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같이 아파할 수 있었을까? 의문은 진행형이다. 내가 만나는 암환자 등 죽을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분들과 그 가족들을 내가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나는 항상 부정적이다. 그렇다고, 가족들의 생계가 걸린 이 일을 포기할 수도 없고 건강을 일부러 해쳐서 암환자가 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거다. 어떤 성직자는 나병환자를 돌보면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기 위해 나병에 걸리기를 자청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난 그 정도로 영성이 깊지는 않다. 그저, 힘들 때 이런 기적 같은 타이밍에 선물 같은 환자와 가족들을 만나면 회복하는 기복이 많은 병원 목사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일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죽음과 위기상황을 거의 매일 만나지만 그 속에 기적 같은 타이밍에 주어지는 생명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제 깡통 코코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