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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말이 Mar 16. 2020

자신의 그릇을 아는 것

소심해서 좋은 이야기

 꼭 약속을 이중으로 잡는 친구가 있다. 


“잠깐 얼굴만 보려고 들린 거야”

“근데 나 조금 있다가 가야 돼” 

“나 옆에 들렸다가 조금만 있다가 올게”


 그 친구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그러면서 친구는 “제발 좀 쉬고 싶다”라고 말한다. 주말에 집에서 편하게 누워있었던 적이 언젠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친구는 약속이 많다. 아마도 이번 약속 때도 친구는 늦게 오거나 일찍 자리를 떠날 것 같다. 한때는 그런 친구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친구의 넓은 인맥도 부러웠고, 많은 만남 속에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는 모습도 부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의 격차가 커져감을 느끼기도 했다. 단지 하루하루가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언제나 좋고, 즐거운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런 생활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나는 점심과 저녁 약속이 같이 있는 날이면 버거움을 느낀다. 점심때는 저녁 약속에 늦을까 걱정을 한다. 그러다 보면 점심에 만난 사람과는 서둘러 헤어져버리고 저녁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한다. 저녁을 먹으면서는 급하게 헤어져버린 미안함에 점심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러다 집에 올 때면 저녁 동안에 뭘 했는지도 가물거린다. 결국 소심한 마음이 반응해서 양쪽에 대한 미안함에 밤잠을 설친다. 내일 전화를 해서 사과를 해야 할지 아무 일 아닌 듯 지나가야 할지 고민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각자의 그릇이 있음을 알게 됐다. 친구는 내게는 버거운 수많은 약속들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다. 반면 나는 하루에 하나의 중요한 약속만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그 이상을 담으려 하면 넘쳐버린다. 하루에 두 개의 약속을 잡는 괜한 욕심에 테이블은 엉망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망치고 관계를 망치는 것은 너무도 쉽다. 이제는 자신의 그릇보다 더 많이 담고자 하는 것은 넘쳐흐름을 과시하고 싶은 허세로 보인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라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기에 더 빨리 그릇의 크기를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는 소심함이 참 고맙다.      


 그릇의 크기를 알게 되면 살아가는 것에 힘을 뺄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싶게 된다. 돈도 많이 가지고 싶고, 친구도 많았으면 한다.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고, 사회적인 명예도 갖고 싶다. 하지만 자기 그릇의 크기를 알면 그릇만큼만 채우면 된다. 억지로 더 담아 보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담아보았자 결국 넘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만족하면서 살게 된다. 왜 나는 큰 그릇이 아닌지 불평하지 않는다. 그릇이 크면 채우는 것이 힘들다. 훨씬 더 많이 담아야 하고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 다 채워짐으로 행복한 것이라면 굳이 그릇이 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그릇이 크다고 행복하지 않다. 우린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세대에 살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행복하진 않다. 어느 때보다 자신을 알릴 기회가 열려있고, 어느 때보다 소통하기 편한 시대에 살지만 딱히 행복감과 연결되진 않는다. 그래서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나 많은 것을 담았는지 보다는 얼마큼 그릇이 채워졌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심하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괜히 넘쳐흘렀다가 수습하지 못할까 봐 두렵다. 사람들의 실망감이 무섭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심내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그릇에 좋은 것을 담는 것에 대한 욕심까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적게 담을 수 있는 만큼 좋은 것들로 채우고자 한다. 또, 남들이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고자 한다. 고급 승용차보다는 조금 더 넓은 집에 살고 싶다.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여행보다는 어느 곳이든 그곳의 역사 깊은 곳까지 파헤쳐보는 여행이 좋다. 그렇게 세상이 메긴 가치보다는 내가 메긴 가치가 좋은 것들로 나를 채우고 싶다. 그릇의 크기는 알고 있다. 크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만큼 좋은 것들로만 가득했으면 싶다. 작은 그릇이라고 대충 살아갈 생각은 없다. 그릇은 작더라도 나와 내 인생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값지다. 그릇의 크기가 값을 정하진 않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여정이다. 처음 살아보는 인생인데 주변에는 잘나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히나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로 전 세계의 잘나고, 많이 가진 사람들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그렇게 우리는 늘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사람의 재능, 부, 명예 어떤 것이든 나보다 많이 가진 것에 부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내 인생이 불만족스럽고 앞으로 걸어갈 인생의 여정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여정인데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채운 격이다. 자신이 채워야 할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은 그런 모래주머니를 풀어준다. 오롯한 나로서 나와 내 인생을 평가하다 보면 인생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남들과 비교하며 남들을 쫒아가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나만의 인생을 살아간다면 누구의 인생도 부럽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자신의 그릇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차곡히 쌓아나가면 된다. 각자의 그릇인 만큼 채우는 것이 그렇게 버겁진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인생에 숨통이 트일 날이 올지도 모른다. 소심한 성격에 하루라도 내 그릇을 알고 싶었던 나는 지금 오롯한 나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래서 남들과 비교하며 살던 고통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나의 그릇의 크기를 알고, 무엇을 채울지를 정하는 것만큼 내 삶을 가꾸는 것은 없다. 누군가와 비교하며 시간을 소비하는 것만큼 인생을 낭비하는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면 된다. 조선시대에 백자가 애용되었던 것은 조선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에 서양과 일제가 백자를 탐냈던 것은 고유의 멋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릇의 가치에 크기는 중요치 않다. 다만 어떤 정신이 스며 있고, 어떤 멋을 낼 수 있는가가 그릇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릇의 크기는 넘침을 막기 위해 알고만 있으면 그만이다. 크기에 연연하지 않고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고민하며 살아가야 진정한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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