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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Aug 14. 2023

그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20대 초중반의 나는 술이 세진 않지만 술의 풍류는 알았고,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을 만나 기분이 좋을 땐 떡볶이나 치킨에 소맥을, 기분이 울적할 땐 삼겹살에 소주를, 고민이 있어 심란할 땐 감자탕에 소주를 주로 마셨고, 비가 오면 관성처럼 파전에 막걸리를, 뭔가 특별한 날엔 아주 가끔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맥주는 탄산이라 조금만 마셔도 속이 더부룩해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대의 끝무렵 다시 학업을 시작하며 바빠져 자연스럽게 술자리 횟수가 줄었고, 일을 시작하면서는 더 바빠져 술을 마시는 건 연중행사가 되었다.


앞 문장에서 '바빠져'라는 것도 틀린 건 아닌데, 사실 더 정확한 이유는 '흐트러지기 싫어서'가 맞는 것 같다.

나는 필름이 끊길 때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는 타입은 아니었고, 술을 적당히 마셨을 때 약간 알딸딸해지는 느낌을 좋아했다. 그래서 살짝 취하면 평소보다 작은 일에도 잘 웃고 관대해지는 게 주사라면 주사였다.

그래서 술을 멀리 했다. 내가 대학원을 다니고 일을 시작한 시기는 과거 이혼의 시기와 겹쳐 있었는데, 무너지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그런 나에게, 평소보다 긴장을 풀어주는 술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았다. 믿을 만한 아주 친밀한 사람들과 만날 때만 가끔 한두 잔씩 했던 것 같다.






정말 딱 필요한 관계만 유지하며 이혼 후 6-7년 정도 오랜 고립 생활을 했다. 나쁘진 않았지만 마냥 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세월이었다.

혼자만의 긴 사색을 슬슬 줄이고 싶어졌고 변화가 필요했다. 마침 독서에 관심이 생겼다. 어느 날 우연히 신청했던 독서 강연에서 영감을 받아 용기를 내 독서모음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가입했을 때에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한껏 부풀어있을 때라, 모임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집에 오거나, 카페를 가는 뒤풀이에만 참여하거나, 술집에 가더라도 음료만 마시거나 술을 마셔도 기분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을 만큼의 아주 소량만 마셨다.

그런데 꾸준히 6개월 이상 참석하다 보니 제법 가까워진 사람들이 더러 생겼다. 또 주말마다 독서모임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나처럼 그저 평범한 현생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처음에 비해 경계심이 많이 풀렸다. 편안한 이들과 함께 다시 조금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남편과 연애할 때도 (대부분 나 혼자) 술을 잘 마셨다. 즐거운 데이트에 흥이 난 날, 괜히 텐션이 조금 떨어지는 날, 직장 스트레스를 받은 날, 여행에 가서 신난 날 모두 술과 함께 했다.

남편은 술을 안 좋아하지만, 내가 원할 때마다 함께 하며 자리를 빛내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술에 대한 선호도에서 보이는 태생적 차이 때문에 나와 남편이 술친구가 되기는 어려웠다.

왜 술이라는 게 애초에 혼자 먹는 게 아니라면 같이 먹는 사람에 따라 맛이 엄청 달라지지 않는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 조금씩 풀어져야 술맛이 사는 법이기에 '저 술 언제 다 먹고 술자리를 끝내지?' 하는 사람과는 서로를 위해 술은 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나의 음주를 막는 것도 아니니 괜찮았다. 문제라면 이제 술 한 잔 편하게 기울일 친구들이 다 멀리 살아서 만나기가 어렵다는 거 정도?

그래서 언젠가부터 술이 마시고 싶으면 집에서 OTT를 보면서 혼술을 즐겼다. 가끔 쓸쓸했지만 충분히 홀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내가 올해 4월 중순부터 단박에 술을 끊었다. 왜냐면, 스스로 병이 있음을 인정했고, 환우로서의 적극적인 삶을 살기로 했기 때문이다. 되도록 병에 좋다는 건 하고, 나쁘다는 건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술은 당연히 '나쁜' 쪽에 속했다. 조울증 약을 먹지 않더라도 술은 병의 증상을 악화시킨다고 했다. 만약 약을 먹는 상태에서 술을 먹는다면 약과의 역학작용으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약을 먹을지 술을 먹을지 솔직히 (꽤 신중하게) 고민했는데, '이제까지 그 정도 술을 즐겼으면 됐다.' 싶어 약을 택했다.


금주는 생각대로 어렵지 않았다. 나는 원래 뭐에 잘 중독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쓸데없는 객기로 2-3년 정도 피우던 담배도 어느 날 갑자기 금연의 생각이 들자 바로 쉽게 끊었었다. 또 명백한 이유가 있는 선택이라 한 번 마음먹고 나니 유혹에 들지도 않았다.

혹시 한 번에 끊으면 요요현상 같은 더 큰일이 생길까 봐 만약을 대비해 무알콜맥주나 무알콜와인도 초반엔 먹었었다. 그런데 몇 번 먹으니 의외로 질리더라. '나도 나름 술이야.' 하며 흉내만 낸 맛이 아쉬웠다. 게다가 무알콜이라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알딸딸함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술을 먹는 분위기만 나게 해 줄 뿐인데, 몇 번 해보니 묘하게 우롱당하는 느낌이라 굳이 그러기가 싫어졌다.






그렇게 술을 끊은 지 4개월 정도가 되었다.

예전에는 맛있는 음식을 보면 '어떤 술과 먹으면 어울릴까?'라는 생각이 다가가면 스르륵 열리는 자동문처럼 즉각적으로 떠올랐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훨씬 건강해진 느낌이다. 마음에 든다.


앞으로도 약을 복용하는 동안은 금주 생활을 계속 유지할 계획이고, 대신 맛있는 음식에 더 마음을 쓸 참이다. 남편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식이 늘어나도 좋을 것 같다는 동화나라 속의 꿈과 희망 같은 마음도 조심스레 가져 본다! ㅋㅋ



몇 번 즐겼던 무알콜 와인. 이젠 안녕-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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