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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Sep 21. 2023

부부 여행의 딜레마 (1)

안 맞는 것 중에 최고?!?

우리 부부의 여행 문제는 그야말로 본질적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가진 여행에 대한 문제는 '여행 타입' 때문이 아니라 '여행 그 존재 자체'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하지만 남편은 여행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없고, 인기 많은 관광지에 가도 전혀 재미가 없으며,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이 동네에서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에 비해 별로 특별하지도 않다고 한다. 이에 더해 커피에 대해서는 특히나 편식이 심해 어디를 가든 지도앱을 켜고 굳이 컴OO 커피를 찾아 헤맨다.

이쯤 되니 '그래도 여행을 싫어하는 것보다는 나은가?' 싶었던 마음이 '그게 정말 나은 걸까?' 하고 헷갈린다. 왜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개인적 견해론 무플이 악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연애 초중반까지는 남편과 같이 여행을 가는 게 설레고 좋았다. 심지어 우리는 사귀기 전에 여행부터 간 커플이다. (관련글: + 여담 셋. 남사친과 건전하고도 즐거운 여행이 될까?) 아마도 그때까지는 서로 끊임없이 할 이야깃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여행 내내 즐거운 대화를 여유롭게 나눴고, '대화에서 오는 즐거움'을 '여행에서 오는 즐거움'이라고 착각해 남편과 여행 취향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내가 여행을 가자고 하면 남편은 그저 의무감으로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남편이 한참 사업으로 바빠지고 있던 시기와 겹쳤기 때문에 처음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을 더 크게 가졌고 '바쁜 시기가 지나가면 나아지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을 거듭할수록 그 느낌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만 갔고, 여행하는 내내 일과 관련된 얘기만 하려 하고 심지어 숙소나 카페에서도 일만 하려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아아, 뭔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구나.'라는 걸 뒤늦게 인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희망을 놓지 못한 채 몇 번의 여행을 반복했고, 2021년 10월 말에 떠났던 강릉 여행에서 드디어 그동안 켜켜이 쌓인 나의 불만과 화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당시의 그 여행은 나에게 무척 중요하고 의미가 큰 여행이었다. 왜냐하면 오랜 전부터 미리 계획해 직장에 어렵게 휴가를 냈고, 정말 오랜만에 떠나게 된 3박 4일의 나름 긴 여행이었으며, '그동안 고생한 나를 위한 보상' 개념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1년 이상을 주 6일씩 일하다 너무 힘들어 업무 조정을 했다. '이제 좀 쉬어보자.' 했지만, 어쩌다 보니 바로 결혼 준비가 시작돼 끊임없이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게 됐다. '왜 이렇게 할 게 많은가?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 다 멈추고 싶었던 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 순간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건 곧 떠날 여행이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기다리며 '그때 맘껏 스트레스 풀지 뭐.' 하며 억지로 힘을 짜내며 매일매일의 to do list를 해나갔고,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딱 알맞게 선선해지는 가을바람을 피부로 느끼며 설렘도 더 커져갔었다.


하지만 그 여행은 지금 생각해 보면 가기 전부터 문제가 아주 심각하게 있었다. 남편은 여행을 언제 어디로 가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여행에 관심이 없었고, 숙소, 식당부터 동선까지 모두 다 내가 계획해야 했다. 심지어 남편이 내가 골라 놓은 숙소 예약을 말로만 하겠다고 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원하는 방이 sold out 되는 바람에 기분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아마 이 사건을 계기로 인터넷 결제 시 남편의 결제비밀번호를 공유하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나는 여행을 하면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풀리는 사람이니까 '이왕 떠나는 거 좋은 마음으로 떠나자.' 했고, KTX를 타고 강릉역에 가서 렌트를 할 예정이라 남편과 서울역에서 만나 기차를 탔다.

그렇지만 좋았던 마음도 잠시, 도착해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시점부터 여행은 이내 삐그덕 대기 시작했다. 미리 찾아둔 식당에 가보니 주차가 어려워 포기해야 했는데, 남편이 같이 다른 식당을 찾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뚱한 눈으로 나만 쳐다보는 통에 몹시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일단 숙소로 갔다. 검색도 귀찮고 여행 의욕도 떨어져 배달 가능한 곳에서 대충 피자를 배달시켜 먹었다. 맛이 없었다. 당연스럽게도 우리의 텐션은 계속해서 떨어졌고 이는 여행 내내 이어졌다.

다음날 주문진에서 <도깨비 촬영지>가 보이는 카페에 갔다가 대게를 포장해 와서 먹었을 때도, 다다음날 안반데기에 방문했을 때도 '남편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남편과 함께 하는 즐거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남편은 뭐가 그리 바쁜지 숙소에서는 컴퓨터로, 밖에서는 휴대폰으로 계속 일만 했다. 그리고 먹을만한 맛있는 게 없다고 음식에 대한 불만만 늘어놨다. 어렵게 시간을 내 같이 여행 온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무례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바쁜 상황이었으면 차라리 일 때문에 여행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해줬어야 한다는 생각에 불쾌했다. 휴가를 통째로 도둑맞은 것 같아 분하면서 슬펐다.

결국 여행 마지막날에는 기분이 너무 나빠져 거의 아무 말 없이 서울까지 왔고, 서울역에서도 냉랭한 분위기로 헤어져 각자 집으로 갔다.






남편이 여행에 대한 사과를 했지만 화가 풀리지 않았다. 나는 결혼해서도 우리의 여행이 그럴 거라는 생각에 우울해졌고 급기야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 이틀 후 예약되어 있던 웨딩홀 상담도 남편 혼자 보냈다.

여행 이후 며칠간 남편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누었다. 남편은 앞으로 여행에 가서는 하루에 1시간 이내로 일을 줄이겠다고 약속했고,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거나 내 마음이 계속 풀리지 않으면 결혼 준비를 다 한 뒤에라도 결혼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숙소 뷰는 이렇게도 좋았는데.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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