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정의 서 Feb 02. 2024

꽃잎이 찾아준 글자

그림 이은숙

펼쳐둔 책장 위로 연분홍 꽃잎 하나가 가만히 내린다. 창밖을 내다보니 사과나무에 꽃이 한창이다.


겨울 내내 꿈속을 헤매던 철학자를 깨운 전령 또한 사과꽃이었다. 꽃향기에 눈을 떴고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눈앞에는 아빠가 아닌 흰색 가운의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순간 향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들이쉬는 숨 사이로 알코올 냄새가 강하게 밀려들었다.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작업실과 집 사이엔 아름드리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철학자가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사과나무는 그곳에 있었고, 봄이면 하얀 꽃향기에 가슴 두근거렸고 붉은 빛깔 가을엔 입안 가득 침이 돌았다. 그저 한 그루 나무였지만 어린 철학자에게 그 길목은 거대한 과수원만 같았다. 조그만 발자국 위로 쏟아지는 꽃비에 길을 잃기도 했다. 아빠의 어깨를 빌릴 수 없는 날엔 애써 까치발을 들어보지만 소용없었다. 그저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선물처럼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지금은 쉽게 사과를 베어 물 수 있으련만...


키가 자라기 전 떠나간 아빠는 사과나무 같았다. 아빠가 있어야만 탐스럽게 붉은 사과를 맛볼 수 있었으니까. 활자를 가린 꽃잎에 조심스레 손끝을 가져다 본다. 마취가 덜 풀린 듯 아직도 둔탁한 감각으로는 습자지 같은 꽃잎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철학자는 어릴 적 사과에 닿으려던 그 의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집중해 활자에게서 꽃잎을 분리해 낸다.


“말”

‘그래, 난 말을 잃었지.’


뇌수술 후, 철학자에게서 모든 언어 기억이 달아나버렸다. 왼쪽 머리를 쓸어내리다 무너진 두상의 흔적을 느낄 때면 사라진 말들의 공간을 실감하며 탄식한다. 잘려나간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남아있을 말들의 끝을 붙잡으려 철학자는 쉼 없이 서고를 뒤지는 것이다. 꽃잎이 가린 그 글자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어릴 적 그림처럼 베껴 쓰던 글자들이 떠올랐다. 아빠의 작업대에서 주워온 점토 조각은 훌륭한 노트였다. 조그만 손가락으로 야무지게 그려낸 글자에는 음절마다 꼭꼭 눌러 부른 미세한 말의 울림도 함께 새겨졌다. 말을 잃은 지금 그때 그 글자들을 만져볼 수 있다면 어떤 신비한 일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꽃잎이 찾아준 활자의 말이 돌아오기를, 창틈으로 불어오는 꽃향기에 아빠가 보내올 두 번째 선물을 기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인의 낱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